[6월 19일] 욥기 20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Jun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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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찬송가 283장) 

말씀 : 욥기 15장 1~35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은 소통과 공감입니다. 공감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존경받지 못합니다.

소통 잘하는 사람은 공감도 잘하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소통도 잘 합니다.

공감은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 그 고통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욥의 고통이 이렇게 점점 심해진 이유는 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욥은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해서 더욱 답답하고 외로웠습니다.

오늘은 20장은 소발이라는 욥의 친구가 욥을 향해 두 번째 변론을 하는 내용입니다.

소발은 굉장히 정의롭게 이야기 욥의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왜 공감이 하지 못합니까?

(20:2)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소발은 자신이 지금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없다고 합니다.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 자기 생각, 자기 주장이 속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욥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거에요. 경청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말만 하려는 사람은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공감하려면 자기 주장을 자기 생각을 말하려고 하기 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녀의 눈높이 맞추어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눈높이 맞춘다는 것은 먼저 자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녀에게 쉽게 설명을 한다 해도 자녀의 말을 먼저 듣지 않으면 눈높이를 맞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감하기 위해서 먼저 경청하는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두 번째 소발이 공감하지 못한 것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20:3)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소발은 욥의 대답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욥은 자기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억울하다고 말했을 뿐인데 소발은 그런 욥의 태도 때문에 자존심 상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발은 욥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욥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욥을 회개시키는 것이 정말 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잘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욥에게 회개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 돕는 말들을 했지, 상대방을 정말 돕기 위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물론 도우려고 했지요.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의 훌륭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욥에게 훈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훈계를 듣고 욥이 회개하지 않고 반론을 펼치자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절대로 돕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할 때에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소발은 이미 욥을 판단합니다. 자기 사고의 틀로 욥을 죄인이라고 판단하고 말을 합니다.

(20: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욥을 향해서 악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경건하지 못한 자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선입견은 무서운 것입니다. 저 사람이 죄인이다. 악하다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올바르게 권고하지 못합니다. 상담할 수 없습니다.

 

소발의 말은 모두 옳습니다. 정확합니다. 그러나 함께 아파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기에 도리어 욥을 죽이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보겠지만 욥과 전혀 소통하지 못합니다.

기차 레일처럼 만나지 못하고 평행선만 달립니다.

인간의 지식과 판단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공감과 소통하는 능력을 배워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을 체휼, 경험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 예수님께 오늘 나아가십시오.

 

주위에 사람들에게 공감받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해 답답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에게 위로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상처받은 치료자입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까? 위로 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가?

여러분의 현재 고통이 공감하는 능력으로 바뀌기를 소원하십시오.

현재 고통은 무익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화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발의 변론은 옳은 말입니다. 소발 앞에 욥이 없다면 여기 20장에 기록된 내용은 한 편에 훌륭한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욥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된 것입니다.

결국 때에 맞는 말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해야 될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 너무 좋은 설교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설교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상처만 될 뿐입니다.

때에 맞는 말을 하는 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

우리 고통이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때에 맞는 말을 하는 지혜와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