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고 빠르게 전하라!
찬송 512장 십자가 군병들아
본문 에스더 8:1-17
하만이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워둔 23m나 되는 높은나무에 자신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원수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기분 좋게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만은 에스더나 모르드개만의 대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하만이 모르드개만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다면 아마 에스더서는 여기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만은 모르드개나 에스더만의 원수가 아닙니다. 그는 유다인의 대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은 우리에게 이것을 상기 시키고자 하만을 향해 “유다인의 대적 하만’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에스더에게는 한 가지의 숙제가 더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만이 저질러 놓은 악한 음모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 악한 꾀가 무엇입니까? 모든 유다인을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의 재산을 탈취하라는 조서와 명령을 철회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왕은 유다인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유다인을 죽이고자 할 때에도 그저 왕의 반지를 빼 주면서 “그 백성”(3:11)을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 이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작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왕의 조서는 철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왕의 반지로 인을 친 조서는 그 누구도 무를 수가 없다는 것이죠. 하만이 죽었다 할지라도 하만의 음모로 쓰여진 그 조서는 여전히 효력이 있고, 없앨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왕에게 아주 신중하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하만의 조서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아하수에로 왕이 어떻게 합니까?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좋을 대로 조서를 쓰라고 합니다. 허락은 하지만 여전히 유다인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왕의 인장 반지로 인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8절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왕의 조서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전달 되었던 조서도 철회될 수 없고, 앞으로 쓸 조서도 철회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만의 조서도 그대로 효력이 있고,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쓰는 조서도 그대로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상황은 조서로 조서를 덮어야 합니다. 하만의 조서가 효력이 없도록 더 큰 효력이 있는 조서를 써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르드개는 왕의 서기관을 통하여 조서는 제작했습니다. 조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1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두 조서가 충돌을 하니까 스스로 목숨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지말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라고 조서를 쓴 것입니다.
이어서 14절에 보니까, 왕의 어명. 그러니까 쓰여진 조서는 매우 급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졸이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빨리 나가 그 조서를 전달하였습니다.
지금 유다인들은 죽을 날짜를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12월 13일이 되면 그들은 모두 죽고, 자신들의 재산은 다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것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죽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물론 이 조서는 시완월. 그러니까 3월 23일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만이 제비를 뽑아 받아놓은 아달월인 12월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 전까지 유다인은 안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의 소식은 유다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했고, 가장 급했습니다. 그래서 역졸들은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빨리 나가 그 조서를 전달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말세지말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 예수님이 다시 오실지 모르지만 오늘 오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말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주를 모르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한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의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가 가장 급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복음의 소식을 듣고,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죠.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무슨 말씀입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이는 들을 수가 없고, 듣지 못하고는 믿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군가가 전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역졸들이 급하게 달려나가 유다인이 다시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여 유다인들이 그 기쁨의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전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전해야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교회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우리가 바로 전해야 하는 자입니다. 선교사만이 복음을 전하고, 사역자만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의 제자가 된 자들은 모두 전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전해야 하는 자들. 사역지에서 전해야 하는 자들. 회사에서 전해야 하는 자들. 무엇보다 가정에서 전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Circuit Breaker로 인해 저 역시 재택근무를 하는 중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재택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일을 한다? 어불성설이지 않습니까? 말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렇다보니 힘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녀와 24시간 함께 있지만 말씀을 가르치고, 신앙을 전수하는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못합니다. 매일은 하지 못하더라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딸아이와 함께 큐티를 하고, 하나님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이 조금이나마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정에만 있으면 신앙을 더 많이 전수하고, 말씀을 더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가정이 이렇지 않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영상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신앙의 전수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자녀들의 e-learning과 남편이나 자신의 재택근무에 쫓기다 보니 정작 가정에서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지 않으십니까?
Circuit Breaker는 참 힘든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가정에 오랫동안 있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보냄을 받은 자로서 가족에게,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자녀에게. 그리고 믿지 않는 가족에게 전달해야 할 가장 급하고, 가장 귀중한 일. 그것은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기도제목
-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자로써 가족과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내 삶이 되게 하소서.
-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주께서 주시는 기쁨의 소식이 이들에게 들려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