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더 2장
찬양: 부르신 곳에서, 내 평생에 가는 길
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후에...그래서 마치 와스디를 폐위한 직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2장 16절에 보면, 에스더의 새 왕후 즉위는 아하수에로 왕 제 7년에 있었다. 와스디를 페위한 것이 제위 3년에 일어난 일임을 볼 때, 3년여 간의 시간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사이에 어떤일이 있었을까?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아하수에로 왕은 아버지의 숙원사업인 그리스 정복을 위해 두 번에 걸쳐 원정을 한다. 그것이 바로,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중요한 역사적인 기록을 생략하고 있을까? 세상의 역사는 그 두 번의 전쟁,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평원에서의 전쟁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바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주목하신다. 바로 우리에게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두 번의 전쟁에서 큰 패배를 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돌아와 아하수에로 왕은 향락에 빠져 살다가 결국은 신하의 암살에 의해 죽었다고 기록됩니다. 지금 2장의 일은 바로 그 전쟁 후에 일어난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와, 몸과 마음이 지치고 고독가운데 , 아하수에로왕은 고독가운데 와스리를 폐위한 일을 단순히 기억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면 “후회”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하수에로 왕의 성품상 그의 이러한 후회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러한 결과를 유도한 신하들에게 책임이 전가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신하들이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눈치 챈 신하들은, 자신들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왕에게 왕후를 뽑을 것을 제안합니다.
왕의 후회, 신하들의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정략적 제안,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모든 눈과 귀를 향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한사람 “에스더를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임을, 하나님의 포석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3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섭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중요한 말씀들...
왕의 신하들은, 전국으로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다 수산궁으로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궁녀를 주관하는 헤게의 손에 맡겨서 여인들을 다 정결하게 치장을 시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 가운데... 드디어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모르드개이고... 또 한명은 에스더입니다.
6절을 보면, 한 구절속에 “사로잡혀가다”라는 히브리어 어근에 네 번이나 나옵니다. 한글 성경에는 두 번만 반영되었지만... 그만큼 그들이 지금 포로였음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어떤 출세를 하든, 그들은 결국 포로로 끌려와서 이방땅에서 정착한 힘없는 처지에 있는 자들이며, 사회적 소수자요, 약자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로잡혀가다”는 이 말은 에스더는 철저하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인생가운데 어쩌면 휩쓸려 살아온 인생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포로로 끌려온것도, 이곳 페르시아 땅에 들어오게 된 것도, 아버지가 죽어 고아가 된 것도, 삼촌에 손에 길러진것도...
그래서 8절... 우리가 이 구절을 이해하면서 와 에스더가 열심히 미모를 가꾸고 미스페르시아 대회에 뽑혀서 왕후가 되었네...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역시 여자는 이쁘고 봐야해... 이런식으로 적용하시면 안됩니다.
지금 에스더는 이곳에 “이끌려”왔습니다. 끌려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8절의 모든 동사 “나아갈떄에, 이끌려 가서, 속하니..” 이 모든 동사를 수동태로 사용하면서 저자는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야심을 따라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이방왕에게 판것도 아니고, 에스더가 미모로 출세를 해보고자 인생의 거친 도전을 한 것도 아닙니다. 끌려왔습니다. 포로, 고아.. 자신의 인생이 스스로 결정되지 않은 운명속에서.. 이제는 그 미모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이방인의 왕”의 궁녀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세상의 힘과 권력에 의해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들이 우리가 선택한 것보다, 그렇게 이끌려 온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9절은 우리가 원하고 선택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지만, 내 힘도 큰 무엇으로 사로잡히고 이끌리는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한가지를 보여줍니다.
9절에는 헤게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였습니다. 9절은 “헤게가 이 처녀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어...” 원문과 영어를 더 정확히 보면. “The girl pleased him”이라고 합니다. 즉 “에스더가 그를 기쁘게 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에스더가 그를 기쁘게 했고, 그녀는 그의 은혜를 얻게 되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이끌려간 그곳... 원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있을 수 있기에 충분했지요, 그런데 그는 헤게를 기쁘게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자기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의 조서와 명령... 그 가운데 끌려간 그곳에서 에스더는 상황에 끌려가는 인생으로 살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곳에 온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였지만, 그곳에서의 운명은 그녀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한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붙들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고, 때로는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는 상황속에 끌려가는 인생처럼 보이는 그 상황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2장을 묵상하는데 떠 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준비시키시는 한사람.. 그러나 그의 운명도 마치 에스더의 운명과 같았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는 노예의 자식이었습니다. 4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노예생활을 해온 그들의 조상들... 그의 부모님을 고된 노예 생활에 일찍 죽었든지.. 아마 그의 삶의 진짜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분명 그는 그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이끌려진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이끌려진 삶, 원치않았던 상황가운데 처했던 여호수아는 원망과 불평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는 과거에 매여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를 민족을 구원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시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어쩌면 오늘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세상의 힘과, 상황에 이끌려 오는 것 같은 인생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며, 또한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과, 그러나 그러한 인생이 포석을 두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구속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되사실 때, 구속하실 때, 그분이 redeem 하실 때, 우리의 모든 과거, 우리가 이끌려 온 것 같은 모든 시간과 우리의 모든 선택을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구속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에스더는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상황을 원망하며 불평과 불안과, 무기력함을 선택하지 않고, 헤게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환경가운데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작은일에 충성하는 자로서 산 것입니다. 그는 주어진 환경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삶에, 시간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삶이 15절과 17절에 “사랑을 받는 삶”이라 말할 수 있는 삶이 된 이유인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말의 원어는 “헤세드” 바로 은혜입니다. 충성을 하지 않아도 될 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헤세드” 룻의 나오미를 향한 헤세드는, 보아스가 룻에게 베푸는 헤세드로 열매를 맺고, 그 헤세드는 결국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주시는 헤세드가 나타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포석을 두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렵고 힘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베푸는 “충성”을 하나님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자로 살아가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시간을 구속하실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 하루를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하길 원합니다.
- 우리의 삶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선택과 끌려가는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이시간 고백합니다.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오늘 에스더처럼 그 자리에서 불안과 불평을 선택하기 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작은 충성을 선택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로 끝까지 충성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 우리의 헤세드가 세상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헤세드, 그 은혜의 나타남이 되어서, 오늘 병들고 지친 이땅에 다시한번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과 그리고 이 외진 곳에서 코로나로 고통받는 근로자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 세계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원리가 결국 이기고 승리함을 믿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그 고통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의 도우심을, 일하심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