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더 1장
찬양: 내일일은 난 몰라요, 주 안에 있는 나에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삶이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보이지 않기에 때로는 불안하고, 두렵지만, 그러나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달리신 십자가를 우리가 바라보며 이 시간 우리의 작은 믿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고쳐 주시옵소서. 우리의 눈을 밝히사, 오늘 우리로 이전에는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는 내가 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욥의 고백처럼, 이제는 주님과 함께 사귀어 살며, 살든지 죽든지 주만을 위해 살고 죽겠습니다!라는 그 고백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흘러나오는 참 고백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이 땅이 주님앞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치 이땅의 주인인 양 살아가며, 이땅을 탄식하게 하고, 병들게 하였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기적인 우리가 되었고, 그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마치 주를 위한 것처럼, 그렇게 사울처럼 했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으며, 우리의 삶에 오직 말씀만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특별히 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고쳐주시옵소서. 이땅의 교회들이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일어서게 하시고, 우리의 손과 발이 그들을 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코로나로 인해 경제적으로 마음적으로 고통받는 우리 성도들이 있습니다. 다 말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고통을 어루만져 주시고, 주님이 나를 통해, 우리를 통해 그 위로와 사랑이 흘러가도록, 우리를 주의 축복의 통로로 삼아 주시옵소서.
오늘 이 짧은 기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다시한번 변화시켜주셔서, 오늘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에스라 1장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해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 이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무너뜨리면서,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지요. 그때 고레스는 유화정책을 펴면서 포로들을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는데, 덕분에 1,2차 걸쳐서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때 조국 이스라엘로 귀환하지 않고 페르시아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상으로 본다면, 1-2차 귀환이야기를 다룬 에스라서와, 3차 귀환 이야기를 다루는 느헤미야서 그 사이입니다. 바로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에스더서의 이야기입니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플롯, 장치중의 하나가 “잔치”라는 것인데, 8번이나 등장하는 잔치를 통해, 저자는 “잔치”라는 주제로 “인간의 잔치와 하나님의 잔치”라는 대결구도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인간 왕이나 권력자들이 주관하는 인간의 잔치들과,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잔치를 비교함으로, 우리가 어떤 잔치를 추구해야 하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장에서 등장하는 잔치를 저자는 굉장히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없는 인생의 특징을 잔치를 것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특징.. 무엇이냐.. 이 잔치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는 자기 과시이고, 또 하나는 바로 허영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여섯달, 180일에 걸쳐서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과시입니다. 왜 그가 자기 과시를 하고 있었는가? 그의 아버지 다리오 1세의 소원이 그리스도 제국을 병합시키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 전쟁에서 패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버지의 숙원사업을 이루어내기 위해, 여전히 제국의 능력과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래서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온갖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이 가득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풍요함과 사치스러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전 그들이 가졌던, 그 솔로몬의 영광을 떠오르게 하고, 지금의 형편 없는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초라함을 더욱 크게 느끼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앞에 설 때에 드는 그 마음처럼 말이지요.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초라한가… 하나님은 과연 나를 돌보시고 계신가?
그러한 마음속에 그 잔치는 그야말로 그들의 바라던 그러한 삶의 모습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바사제국의 폭력과 압제에 굴복 했던 민족들의 제후들이지요. 그런데 자신들의 처지와 아픔과 고통은 잊어버린 채, 어느새 그 잔치가 주는 포만감에 젖어버립니다. 그들의 비참한 처지는 화려한 축제와는 어울리지 않았고, 그 잔치의 화려함은 그 모든것을 잊고 마치 그들이 모든 것을 가진것처럼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흥겨웠던 잔치는 한 순간에 재난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잔치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과시는 반드시 허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자기 아내 왕후를 데리고 오라 합니다. 왕후의 아리따움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왕후에 대한 존중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허영입니다. 사실은 아닌데, 그렇게 가치있다고 보이고 싶은 것, 그것이 허영이고, 그러한 허영은 반드시 분노를 가져옵니다. 허영이 크면 클수록 그 인생에는 허무함을 가져오고, 그러한 인생엔 늘 남을 향한 분노와 울분이 자리잡게 됩니다.
왜 왕후는 왕의 명령을 거절했을까? 학자들은 왕이 왕후에게 면류관만 쓰고 벌거벗고 나오라고 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는 그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저자는 그 이유가 아니라, 왕후의 거절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고, 그 이유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왕은, 술이 주는 기쁨에 이끌렸고, 또한 허영심에 가득찬 분노에 이끌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통해 역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째든 이 모든 일은 왕의 자기 과시 때문이요, 자기의 허영으로 인한 분노 때문 이었지만, 왕은 이 모든 책임을 다른 이에게 떠 넘깁니다. 왕후를 불러 자초지정을 물은 것이 아니라, 그는 일곱 방백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묻지요. “이 일이 과연 맞는 일이냐?” 그 지혜로운 자들이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왕의 기색을 살피는 것”
왕은 그들에게 지혜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해.. 성경은 이것을 “당짓기”라고 말합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self seeking” 내 생각에 돌의해주고, 내 분노를 정당화 하기 위한 편 만들기..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이것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왕과 같은 모습이 우리안에 없는지 정직하게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 화려하고 멋진 것 같은 그 잔치는 점점 허무와 분노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왜 처음부터 이러한 최상급 포도주를 내놓지 않았냐고..”했던 요한복음 2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첫 표적,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그 잔치와는 전혀 다른,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인생, 그래서 갈수록 더 품격있고, 향기나는 인생과는 전혀 다른.. 화려해보이지만, 허무함과 분노로 향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은 없는 인생.. 하나님없는 잔치는 그렇게 점점 비극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16절에 이르면 , 왕의 기색을 살펴, 그가 듣고 싶었던 그 말을 한, 일곱 방백중 하나인 므무관 말을 듣고 좋게 여깁니다. 그리고 므무관의 말대로 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잔치의 가장 큰 특징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옳고 그름이 누가 더 큰 힘을 소유하고 있고, 그리고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느냐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큰 유혹이지요.. 힘과 권력 따라서, 나의 유익에 따라서 옳고 그들을 판단하고 싶은, 아니 해야만 하는 그러한 유혹이 우리가운데 있습니다.
1장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 이 세상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더 먹먹하게 하는 것은, 그 속에서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에스더와 모르두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은 힘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들의 자기과시와, 허영과, 그것이 주는 유익을 따라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옳고 그름조차도 결정되어지는 그러한 세상에, 대체 하나님은 어디계시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바둑에는 “포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포석이란 앞으로 되어질 일을 예상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몇수 앞을 내다본다고 말하는 그것입니다. 결국 왕후 와스디를 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변개할 수 없도록 조서를 내립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새로운 왕후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2장에 등장하는 에스더.. 바로 에스더가 왕후로 세워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아하수에로 왕의 잔체와 와스디의 불순종, 그리고 자기 과시와 허영으로 인한 허무함과 황의 분노, 그 모든 일은 에스더를 왕후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포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스더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받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장의 기록하는 이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배경이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힘과 권력, 그들의 욕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 같았으나, 사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1장에서는, 아니 에스더 전체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삶이 막막해 보입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디계신가? 왜 이 모든 어려움을 빨리 해결해주시지 않는가? 탄식하며 울부짖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에스더 1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다시한번 기억하고 바라보길 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며, 또한 이 세상이 세상의 가치관과 권력에 의해서 흘러가는 것 같아 보이나,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권력자의 기색을 살피는 것이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나, 우리는 세상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로 주님을 믿으며 오직 말씀을 따라 살게 하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든 선택의 기준와 근거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예라 하시면 예가되고, 아니오에 아니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최선의 때에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을 이루어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다시한번 세상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우리 이시간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첫째, 오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믿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이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백하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고 살아가게 하소서.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게 하소서.
둘째, 각기 자기 옳은 소견대로 살았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주시고, 이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이땅을 고쳐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