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라 5장
찬송: 하나님의 세계(홍이삭),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에스라 4장을 통해 우리는 보았습니다. 앗수르에서 옮겨져와서 예루살렘에서 살던 자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무너진 성전, 예배를 재건하고자 했던 그들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지요.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성전을 건축하게 하라!!”는
그러나 그들의 제안은, 종교적 혼합주의에 대한 유혹이고 도전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열왕기하 17:3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 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하나님만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 이유는 무엇? 그 민족의 풍속대로.. 그 민족의 풍속이 무엇? 자기의 풍요로움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되든, 누가 되든, 그저 풍요로움을 줄 수만 있다면 그 신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예배하였지만,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 되셔서, 삶이 곧 예배가 되는, 그러한 삶, 그러한 예배가 아니라, 그저 삶속에 그저 예배를 포함시키는 것 뿐이었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며, 예배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주인되지 못한 삶. 그곳에 자기의 풍요로움을 위해 하나님도 예배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종교적 혼합주의의 유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단이 우리를 능력이 사라져 버린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전략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것?이 아닙니다. 지금 모이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배하지요. 사단의 전략은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하나님을 믿고 예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풍요함을 위한 것일뿐.. 우리의 신앙을 능력이 사라져 버린, 힘없는 종교적 행위로 그치게 만들고자 하는 그 종교적 혼합주의에 대한 유혹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가옵니다.
그러한 그들의 전략은,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성공적이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열정적으로 성전을 짓고자 했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그들의 방해에, 성전 공사가 멈추게 되자, “아직은 때가 아닌거야”라고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그 목적과 사명을 잃어버린 채 자신들의 삶에 함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자신의 풍요로움을 위한 것일 뿐,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주인으로 살아갔던 그 하나님의 대적들의 삶의 모습처럼, 더 좋은 집, 더 좋은 낙타(차)를 가지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편하게 사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행복의 조건이 되었고, 기준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무너져 있던 성전과 예배의 회복에 대한 관심은 점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적 침체입니다.
그때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부르십니다 그들을 통해 이야기 하시지요. “이 성전이 황폐하거늘, 너의 삶의 예배가 무저져있거든…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바벨론에서 떠나 이 먼곳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을 받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고자 했던 그 비전과 꿈을 잃어버린 채, 코 앞의 일들에만 함몰되어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질주를 하던 그들을 멈추어 서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학개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세상이 말하는대로, 그 행복의 기준을 위해 좋은 집, 좋은 옷, 명예와 돈을 위해 살았지만, 그리고 그것들을 갖게 되었지만, 아무리 채워도, 먹어도, 가져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채워질 수 없는 구멍 뚤린 주머니와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점점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영적 침체입니다.
영적 침체는 무엇입니까? 바로 부르심의 소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로지 잘먹고 잘서는 것, 성공과 부요함이 목표가 되어버린 삶.. 그것이 바로 영적침체칩니다. 오늘 우리에게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늘 왜 우리를 이곳 싱가폴까지 부르셨는지.. 분명 그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 설렘과 기대로 왔는데.. 어느순간 그 부르심을 잊어버린채, 나만의 유익만을 위해, 풍요로움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버린… 여전히 예배하긴 하나, 그 예배 또한 나의 유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렸습니다. 영적침체인 것입니다.
무려 그들은 15년이 넘는 시간동안, 기나긴 영적인 침제를 겪습니다. 그러나 2절에 보면 소망이 없어 보인 그들이 다시 무너진 예배의 삶,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그 삶을 회복하기 위해 일어섭니다. 어떻게 그들이 이 깊은 영적 침체를 깨고 회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오늘 영적인 침체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세지..
그들이 그 영적 침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에스라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5:5절 “하나님이 유다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무엇입니까? 끝없이 한나님을 떠나는 인간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시며, 설득하시는 사랑, 그 은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돌보심이었던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 돌보심은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1절을 보십시요.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시작하더니” 2절에 이에 그들이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오랜 영적 침체를 이겨낸 것입니다. 즉 다시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그 끝없는 사랑은 바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래서 그 말씀을 머라고 합니까? 신령한 젖, 즉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과 생명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시간, 이 생명과도 같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 돌보심.. 그들에게 들려졌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학개1:11-13절)
-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첬째, 다리오왕 2년 6월 24일에 학개를 통해 전해진 그 말씀(학1장 13절)은 바로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
그런데 그게 언제였다고 말합니까? 여섯째달.. 사실 이 시기는 추수를 마쳐고 거두어야 하는 때였습니다. 한해의 소득을 거두는 그때에, 지금 성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 것,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우리의 환경와 상황에 우리의 시선을 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상황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마치 찬양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이것이 모든 상황을 다 사라지고, 오직 구속된 주만 보이게 했던 그 하나님의 돌보심 메세지..
오늘 우리의 상황이 답답합니다. 힘들다는 소리가 대부분..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시요. “내가 너와 함께 한다”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2년 7월 21일에 들려져 옵니다. 4절!!! “굳세게 하라” 15년전 짓다가 만 성전의 터는 거의 폐물이 되었을것, 그것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슬펐을것.. 그런 그들에게 “굳세게 하라” 스스로의 초라함과 세상의 거친 도전 속에서 두려워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워말고, 굳세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무엇?
학개 2장에서 계속 말씀하실때마다.. 반복되는 한가지 그게 무엇이냐 “내가 만군의 여호와다”라는 것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근거는 무엇? 우리와 함꼐 계시는 하나님이 그냥 마음좋은 동네 아저씨 그런 정도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참 소망인 이유..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다!!라는 것!!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니 여러분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내 자식을 더 사랑하세요.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말은 그냥 단순하게 보면 “네 인생. 나한테 맡겨”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인생은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세상의 주인, 즉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그들에게 전해진 말씀은 스가랴 1장 1-6절입니다.
8개의 환상.. 그 말씀은 이 한마디로 정리됩니다. “돌아오라”는 것
이제 핑계를 그치고, 타협하지 말고, 약속의 하나님께로, 만군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즉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왜 회개해야 합니까?
스가랴 5:12-13절은 분명히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 했지만,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살아갔던 삶, 그 가치에 대한 회개이고, 잘못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회개란,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 나의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 관계의 문제인 것입니다.
“돌이키라” 나를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집요하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요구, 그 사랑에 항복하는 것이 바로 “회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인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였다~ 굳세게 하라! 내가 만군의 여호와다!! 돌아오라!!!
어쩌면 여러분 당연한 말, 흔하게 들었던 말이야!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으로 인해 회복했고, 변화했고,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삶으로, 그. 부르심의 소명을 회복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왜요? 그것은 무엇인가..
학개 1:12절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로 여겼다! 누구의 말을 선지자의 말을…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한 선지자의 흔한, 뻔한 위로, 혹은 권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쩌면 그 듣기 불편한 그 말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 그분의 목소리”로 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말씀앞에서도 은혜를 받는 이와 받지 못하는이, 회복을 경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인 것!!! 오늘 이 아침에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상황과 어려움속에서도 우리는 굳건히 서서, 오늘 우리의 소명을 따라 사는 놀라운 인생, 학개 2장 20-23절의 인생이 될꺼라 믿습니다.
기도제목
1. 주여, 오늘 아침마다 들려오는 이 말씀이, 단지 목사님의 말, 혹은 흔하게 들려오는 뻔한 말이 아니라,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믿습니다.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회개에는 늦음이 없는데, 주님께 돌이키오니, 영적인 침체 가운데 있던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다시 그 소명에 붙들려 살아가게 하소서.
2. 종교적 혼합주의가 우리속에 들어와,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인되지 않은 삶으로 살아갔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로 인해 코로나가 왔고 그로인해 고통받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회개하오니 우리를 고쳐주시옵소서. 우리의 죄, 이땅의 죄를 중보하며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