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1장
찬양: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여호사밧에 아들 여호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호람에 대한 기록을 그냥 간단히 다루고 있는 열왕기와는 달리, 역대기의 저자는 상당한 분량의 이야기를 첨가하여 여호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왜 그의 이야기를 깊이 다루고 있을까요?
여호람의 이야기의 특이한 점은 아버지 여호사밧의 아들들의 이름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의 아들의 이름들을 일일히 나열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저자는 왜 여호사밧의 아들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을가?
그 이유를 우리는 3-4절에서 보게 됩니다. 여호사밧이 그 아들들에게 골고루 은금과 보물, 그리고 견고한 성읍들을 주었고, 장자인 여호람에게는 왕위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왕이 되지 못한 아들들을 배려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를 생각하면, 그들의 역사가 알려주듯이 이렇게 한 것은 왕자들 사이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을 막기 위함 이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인간의 죄악됨과, 흉악함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장자인 여호람은 왕에 오른 후 그의 모든 형제들을 죽입니다.
자기의 왕위를 더욱 견고하기 위해…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자기의 형제 마져도, 가족마저도, 그는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작 8년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젊은 나이인 3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인생이 허무한가요.. 8년을 누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버린…
왜 그는 이렇게 되었을까?
6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아합의 집과 같이 되었다!! 그가 이스라엘의 길로 행하고, 아합의 집과 같이 되어버린 이유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가문과 혼인 친척관계를 맺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그의 권력을 지키고,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여호사밧의 정책으로 인해 여호람은 아합의 딸과 결혼을 함..
아합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왕중 가장 사악하다고 일컬어지는 왕,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에, 엘리야를 죽이려했던 그 왕~ 모든 것을 갖고도 더 갖고 싶어서 나봇을 죽여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왕.. 그게 바로 아합이었습니다. 아합은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아합 역시도 그의 권력과,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정략적 결혼을 결정합니다. 시돈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 이세벨은 이스라엘로 올때에 그냥 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는 신인, 바알과 함께 왔지요, 아합에겐 거리낄것이 없는 것이, 바알은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풍요로울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하면서, 여호람은 바로 그 바알의 정신을, 그 바알이 추구하는 그것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바알 신앙의 핵심에는 산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람은 이전보다 더 많은 산당들을 세웠습니다. 산당은 어떠한 장소인가? 바알신에 예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성적인 행위를 함으로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남신이 되고, 성창들이 여신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람은 산당을 세워 거기에서 예루살렘 주민들로 하여금 음행하게 하고, 유다를 미혹하게 했습니다.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산당”입니다.
이 산당의 무서움을 우리는 어디에서 확인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어떤 왕도 이 “산당”을 아예 없애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회복을 꿈꾸며 각 성읍에 말씀을 지도자들을 세운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도, 가장 선한 왕으로 꼽히는 그의 할아버지 아사왕 조차도 이 “산당”만은 없애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며 오늘 저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산당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지만 여전이 더 많은 것과, 풍요로움을 위해서라면 성경의 말씀도, 타협할 수 있고, 타당하다 말 할 수 있는.. 나의 산당은 무엇인가…
또한 오늘날 많은 교회들 속에, 풍요로움과 편안함과 부흥이란 이름으로 들어와 있는 이 바알의 정신, 산당이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하나님앞에 정직히 우리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풍요로움의 신, 바알을 따라 갔던 여호람의 결국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풍요로움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겠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시겠다는 것. 그는 다 많이 소유하기 위해, 경제적 풍요로움을 위해.. 바알조차도 받아들이고 따랐던… 그런데 하나님은 그 풍요로움을 거두시겠다는 것..
하나님은 그들로 알게 하실 것인빈다. 풍요함을 주는 진정한 풍요의 신이 누구인가..
그렇게 악한 그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는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신학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바로
6-7절..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그를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은 14절부터 구체화 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병과 재앙이 다가옵니다. 그의 자녀를 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포기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 포기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랑에 항복해야 합니다. 산당을 제거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진정한 풍요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믿으며..
중보기도
- 우리의 교만함을 용서하여 주시고, 풍요로움을 쫓아 섬겼던 우리의 산당을 제거하도록 도와주소서.
- 하나님보다 풍요로움을 쫓아 산당을 세워갔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다시한번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이땅의 교회들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