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내 주의 보혈은(찬송가 254)
말씀 : 룻기 3:1~18
오늘 말씀은 룻기서의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업무름의 사건, 히브리어로는 고엘이라는 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고엘은 하나님이 분배해주신 땅이 다른 지파나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서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그래서 고엘이 된자는 가난한 친척의 땅을 다시 사주거나, 부당한 피해를 입은 친족을 도와주거나 복수를 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자녀가 없이 죽은 친족인 경우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할 의무도 있었고, 친척의 죄값까지 대신 받아야 할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고엘이 된 사람에게는 상당히 억울해보이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은 이유는 고엘이 되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능력이 전제되어야 했기 때문에 아무나 고엘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엘이 없다고 하더라도 50년이 지나면 땅을 돌려주고 종에서 해방되는 희년제도도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고엘제도는 유명무실화 되어가는 법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고엘제도가 핵심적인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게다가 지금은 사사시대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만족만을 위해 살아가던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내가 가진 것을 희생해야 이행할수 있는 고엘이 되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오미나 룻이나 다 너무나 연약한 사람이에요. 이들을 도와준다고 이득이 될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괴로움이라는 놀림을 받는 늙은 시어머니와 이방여인이자 과부를 돕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고엘은 그 등장자체가 아주 신비로와 보일정도입니다. 생각할수 없는 명제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엘제도로 룻은 무엇을 얻고 있을까요? 무엇을 얻고 있기때문에 성경에서 특히 룻기에서 이 고엘제도의 의미가 클까요? 단순히 먹고 살만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굳이 성경이 사문화된 고엘제도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보아스가 룻과 결혼했고 잘 살았다고 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룻이 누구입니까? 이방여인입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아니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조차 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서 삽니다. 최소한 그녀의 몸은 이제 신앙의 공동체, 하나님의 자녀들의 무리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입니다. 그저 신앙의 공동체 속에 들어와 있을 뿐, 그녀가 변한것은 없습니다. 하루 하루의 먹을것을 걱정해야하고, 자신의 신변을 걱정해야 하는 힘없고 가난하고 나약한 외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건으로 어떤 일이 그녀에게 일어납니까? 고엘인 보아스를 통해 공식적인 이스라엘의 기업을 얻습니다. 공식적인 이스라엘의 백성이 됩니다. 무슨말입니까? 몸만 신앙 공동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자체가 공동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진짜 믿음의 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100% 그녀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성경은 고엘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흔적, 주님의 약속, 주님의 기업을 가지고 있어야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땅없는자, 기업없는자를 회복시키는 고엘제도, 이러한 회복을 통해 다시는 종처럼 살지 않게하는 이 고엘제도는 신약성경의 예수님을 상징해 줍니다. 죄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예수님은 친히 고엘이 되셔서 아무런 값없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없으면 진짜 성도가 아닌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헌신을 하고, 봉사를 한다고 해도 예수님이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혈을 기업으로 받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함 밖에 있는 사람과 하나 다를 것이 없는 죄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치 룻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어도, 고엘을 통해 기업을 받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아니듯, 우리도 신앙 공동체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통해 보혈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성도도 제자도 아니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룻의 이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말입니다. 9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우리의 고엘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물어보십니다. 너는 누구냐고요… 그때 우리가 해야할 답이 바로 룻의 대답인것 같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 나와 함께 해주세요.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일맥상통하는 고백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고엘이십니다 라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3장의 룻을 보시면 룻은 묵묵히 이 고엘의 약속 만을 바라보며 위험해보이는 일을 진행해 갑니다. 하지만 룻에게 위험이 온것이 아니라 회복이 찾아옵니다. 불가능할수 밖에 없는 정말로 무모해보이는 일이었지만 믿음의 한발을 내딛자 그녀는 참된 믿음의 울타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새벽시간이 룻과 같은 은혜가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단순히 몸만 교회에 있는 것, 몸만 신앙의 테두리에 있는 신앙인이 아니라 룻처럼 결단하고 주의 약속만 바라보며 믿음의 한발을 내딛어서 우리의 모든 것이 믿음안에 거하며, 그로인해 우리의 고엘되시는 예수님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