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찬송가 545장)
말씀 : 출애굽기 4:1~31
출애굽기 4장의 말씀은 하나의 이야기인것 같지만 성경을 분석하는 신학자들에게서는 몇가지 이야기가 섞여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도그럴것이 조금 뜬금없는 상황들이 갑자기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를 달라하는 모세와 그러한 모세에게 증거를 주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이 다음 이야기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떠나서 이스라엘에게 이르렀다 뭐이렇게 연결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흐름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았고, 또 그 증거가 어떻게 쓰여질지도 알게 되었는데, 모세는 순종이 아닌 핑계를 대기 시작합니다. 10절에서는 언어적인 힘듦으로 못가겠다는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보낼자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정도의 깜냥이 안되는 사람이라고 우회적으로 거부의사를 하나님께 전합니다. 이부분이 처음에 있었으면 문제가 없죠..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상징인 지팡이기적과 나병의 기적, 그리고 나일강물이 피가되는 기적을 행할 위대한 능력을 부여받은 후에 이러한 일이 전개가 됩니다.
또하나 그래도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애굽으로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24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여기도 좀 이상합니다. 물론 성경학자들마다 조금씩 이해는 다릅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모세의 둘째아들이 할례를 안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를 위해서 모세의 길에 나타나셨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죽이려고 한 자가 단순히 그로 기록되어 있기에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고,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십보라의 믿음이 모세보다 더 좋은 인물로 그려질 수 밖에 없으며, 26절에서 할례때문이었더라 는 문장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는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은이에 모세가 포함되며, 모세라고 한다면 그 여행중에 할례를 행할수 있는 이가 아내인 십보라 밖에 없었기에 십보라는 우선 아들중 누군가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결국에는 모세를 할례시켜준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즉 모세와 아주 관련이 있지만 그것이 누구인지, 또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주 희미하다는 말입니다.
이러기에 오늘 말씀을 너무 깊이 들어가면 해석하기 힘든 곳을 쉽게 만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말씀을 읽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자료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장을 만날때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도 중요한데, 그 내용보다는 구조를 먼저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구조적으로 본다면 한편의 극과 같은 기승전결의 모습이 보입니다. 서론은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이유와 증거를 요구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에게 이유와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세가 간직할수 있게 하십니다. 소설에서 서론 다음에는 위기가 나오죠. 마찬가지로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가 끝이 나자 위기가 그려집니다. 순종하는 것 같은 모세가 못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 이유는 처음부터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세에게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순종하기로 결정하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도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인간적인 연약함이 찾아오는 겁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시간상 같은 주제의 말씀이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에게서 발견됩니다. 집에 가셔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위기에 하나님은 너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로 17절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아닌 모세를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세에게 새겨주십니다.
이러한 위기가 끝나고 4장은 소위 클라이막스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클라이막스에 여러 해석이 가능한 할례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즉 4장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할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할례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17장 10절~11절 하나님은 이렇게 할례를 정의해주십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이 모세의 여정에 긴급히 찾아가십니다. 24절의 만나다라는 단어의 원어가 긴급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모세가 어떤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적도 행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집트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도착하기만 하면 자신의 약점인 언어의 어눌함도 해결해줄 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 준비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 상황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이집트로의 여정을 떠나고 있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모세를 급하게 찾으신 이유가 바로 “할례”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요? 할례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앞세우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이 역사속에서 그대로 실천되어진것이 바로 여호수아때입니다. 여호수아 5장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할례를 받습니다. 여기는 이미 요단강을 건너간 이후의 장소입니다. 여리고가 코 앞에 있는 곳입니다. 전략적으로 아주 불리한 그곳에서 하나님은 할례를 명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5장 9절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에 새기는 것을 애굽의 수치를 떠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나님은 해석하여 주십니다. 무슨 말이냐면 할례를 통해 앞으로의 전쟁이 이미 승리자로 서 있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이 모세의 길을 막으시고 급하게 찾아오신 이유는 이후로 진행되는 이집트와의 영적인 전쟁에서 이미 승리한 승리자로서 있음을 온몸에 새기고 있으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모세 자신이나, 히브리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미 승리는 주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의미로 할례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흔적이 있을때, 우리의 모든 눈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기 떄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하루 어떻게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오늘 하루를 생활하시면서 어떤 복속에 있기를 바라십니까? 오늘 말씀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그 바람은 이미 답으로 주어졌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복과 평강이 오늘 기도함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볼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며, 그 눈은 할례, 즉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할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희미하면 하나님은 급하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오늘의 삶에 가장 중요한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나 증거나 응답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응답하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하루와 평생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새벽시간,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새기심으로 영적인 할례를 받으시고, 그로 인해 승리이시며 온전한 답을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