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창세기 29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Oct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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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주여 지난밤 내 꿈에 (찬송가 490장)

말씀 : 창세기 29:1~35


오늘 읽은 29장의 말씀부터 31장의 말씀까지가 하나의 큰 틀속에 있는 이야기 입니다. 야곱과 삼촌 라반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하란이라는 지역적인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말씀에서 야곱은 하란으로 들어가고, 31장 55절에서 이 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29장 부터 31장까지의 이야기를 이해함에 있어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받은 꿈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제 읽었던 28장 14절과 15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꽈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과 자손들이 복을 받게 하시고 그때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에 이 약속이 아주 깊게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1절에 “야곱이 길을 떠나”라고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 문장은 야곱이 그 발을 들어올렸다 라는 뜻으로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그가 온전한 회복과 나음을 입었고, 그로인해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신속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로 말하면, 근심이 사라지고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는 뜻입니다.

하란까지 약 700여 KM를 이런마음으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하란에서 삼촌 라반과의 삶도 그러했음을 보여줍니다. 20절의 말씀에 칠년을 며칠처럼 여겼다는 말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수년을 수일처럼 여겼다고 해석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가 우연히 우물곁에서 라헬을 만나고, 순적하게 라반을 만나 같이 거하게 되고, 평생을 사랑할수 있는 여인을 만났다는 것을 28장의 말씀을 기초로 본다면 결국 하나님의 순탄한 인도하심으로 보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하란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온것처럼, 7년의 삶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수일처럼 여겼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이렇게 20절까지는 벧엘의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아주 순적하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일들이 계속진행됩니다. 문제는 21절 이후로 진행됩니다.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을 못하고 언니 레아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레아와 라헬을 17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우리는 결과적으로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레아는 못생겼고, 라헬은 아름다웠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일부 주석가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시력이 약하다는 말의 뜻은 눈에 빛이나 번쩍임이 없었다는 것으로 우리식으로는 총기가 좀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모습이 고대 근동에서 특히 동방에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여인상으로 제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17절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표현으로 동양적 미인과 서양적 미인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온전합니다. 외적인 미의 차이가 아니라, 둘다 아름다움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 모두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여인을 통해 야곱을 온전하게 만드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상대적으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외모차이가 아닌 야곱의 취향때문입니다. 문제는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상태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레아에게 자녀의 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남자아이의 출산을 신의 은총으로 해석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매번 남자아이를 낳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편에게서는 그만한 사랑을 못받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신의 사랑을 듬뿍받고 있다는 증거들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라헬은 어떻습니까? 야곱이 더 사랑하였고, 더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가 없습니다. 사람에게서는 사랑을 받지만, 실제 삶의 결과는 신의 저주가 있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삶의 모습이 가나안에서의 야곱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덜 받았던 야곱, 그런데 아버지의 복을 가로챔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은 에서,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복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 불행을 경험합니다. 지금 야곱은 그의 아내들을 통해 그의 지난 그 삶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 모두가 다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삶속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은 상황을 보여주심으로 야곱을 온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들에 야곱의 용인이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바뀌었을때, 그는 레아를 버릴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아내됨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모든 일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만 경험하고 있는 이 답없어보이는 일들 마져도 하나님의 함께함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도 하고, 성질도 내고, 힘듦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결과는 돌이키려하지않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을 다듬으시고, 보다 더 온전한 자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레아와 라헬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 두양면의 삶이 야곱을 온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 두 여인에게 공평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평한 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예수님은 라헬의 자손이 아니라 레아가 낳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을 적용하실때 누구의 모습에 나를 적용해보시겠습니까? 야곱입니까? 레아입니까? 라헬입니까?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 모두를 사랑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실 중요한 제목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문제의 해결함은 야곱을 통해 답을 얻으시고, 지금의 삶의 문제는 레아와 라헬을 통해 답을 얻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답을 얻음에 있어 우리를 자녀삼아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적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