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창세기 24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Oct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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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죄짐 맡은 우리 구주(찬송가 369장)

말씀 : 창세기 24:1~67


창세기 24장의 말씀은 창세기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또한 내용적으로는 이전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이후에 등장하는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 모두와 많은 연관성이 있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무명의 종과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가 주인공인 본문이기에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그리 큰 주목을 받은 본문이 아니기도 합니다.

오늘도 시간상 세밀히 본문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꼭 돌아가셔서 다시한번 말씀을 묵상하심으로 이 본문이 주는 깊은 은혜를 되새겨 보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다는 사실과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대의 세계관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을 기초해서 본다면 복을 주셨다는 이 말에 의구심을 가질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복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자녀의 복이 항상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에게는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은 분명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얻은 자녀를 통해서임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이 소원하게 느껴질정도의 상황이 닥쳤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사이의 자녀는 이삭 한명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현재 노총각입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아브라함의 마음에 확신이 무뎌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일들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2절에 아브라함의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은 분명 오랜 시절을 아브라함과 함께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행하던 일이나 아브라함의 친족을 알아볼수 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종을 불러 맹세를 하게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 며느리를 맞이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을때의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고향 족속에게로 가서 아내를 택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내 고향이 말레이시아니 KL가서 며느리를 찾아 데려오라는 말입니다. 목적지가 있는 것같지만 없는것과 같습니다. 구체적인 명령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뜬구름잡는듯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5절에 이렇게 되묻는 것입니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무슨 말입니까? 누가 오겠냐는 겁니다. 처음보는 사람을 그것도 결혼 당사자가 아니라 한낯 종에 불과한 사람을 누가 따라오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그나마 그런 여인을 찾기라도 한다면 이삭을 데리고 가도 좋겠느냐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상식적인 반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함께 7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브라함은 이 비상식적인 일을 종에게 명령하며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때의 일을 거론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이 행하실것을 선포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그 말씀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은겁니다. 지금의 복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분명하게 이루어질것을 확인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했던 그 모습을 반복케 함으로, 성실히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로인해 민족과 열방을 향한 그 꿈과 비전을 죽는 그날까지 간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일에 실행자, 무명의 늙은 종, 그가 누구인지는 성경이 침묵하지만 계속되는 일들을 통해볼때 그 역시 아브라함만큼이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했던 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종은 단순한 맹세만으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물어봅니다. 그의 선택이 필요할때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가 상당히 독특합니다. 일반적이라면 ‘주님 나를 위해서 방황하지 않고 속히 아삭의 아내될 사람을 만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12절을 보시면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기 원하신다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즉 이 종은 철저히 주인의 복과 은혜를 위해 쓰임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한가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더하여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말입니다. 이종은 분명 이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가지고 갈때,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과 은혜를 빌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리브가를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말한 단순한 고향사람을 넘어서서 친족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가 27절입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주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에 제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에 등장하는 중보기도의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의 간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역시 타인의 것으로 돌리는 것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중보기도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대상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의 현장에 있는 종역시 하나님의 응답으로 평강의 복을 누리고 있으며, 마음에 가지고 있던 짐도 내려놓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종의 모습을 통해 중보기도의 영적인 힘을 옅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리브가입니다. 오늘 말씀의 실제 주인공 리브가, 성경은 그녀의 결단을 따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결단은 실로 대단한 결단입니다. 종의 말만을 믿고 그 먼 여행을 떠나며, 당시로서는 미지의 세계로 떠난 결단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58절 말씀,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가겠습니다 라는 리브가의 이 한마디는 아브라함을 이어서 이삭에게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을 유업으로 받게되는 결단의 선포입니다. 에스더가 목숨을 무릎쓰고 왕앞에 나가겠다고 한 모습과 같습니다. 이 결단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종이 가지고 온 많은 재물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말한것처럼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리브가를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종을 만나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그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를 생활하실때, 누군가를 축복하는 삶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중보기도의 삶과,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에게 찾아오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여 하루를 충성되게 살아가심을 통해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받은 복과, 리브가가 행한 결단으로 받는 은혜를 동일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