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너 시험을 당해(찬송가 342장)
말씀 : 창세기 19:1~38
오늘 함께 묵상하는 창세기 19장의 말씀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과 그러한 멸망에서 구출을 받게되는 룻의 가족들, 그리고 모압자손과 암몬자손의 기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롯의 눈에 하나님의 동산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거하면서부터 롯은 전쟁을 경험하고 포로생활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은 그땅에 거하는 것을 계속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힌트가 오늘 말씀 1절에서 발견되어집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앚아있었다는 말이 바로 그 힌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재판장소로 사업거래처로 사교생활의 주요무대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기에 롯이 그곳에 앉아있었다는 사실은 롯이 소돔에서 지도층인사로서 그곳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서 나그네 2명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보다 더 덕망있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음을 추측할수 있습니다. 소돔에서 상당한 부유함을 누리며, 어느정도 인정받는 위치를 가진 롯이 더 높은 자리에 가고자 성으로 온 나그네를 영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욕심이 결국 소돔사람들을 충동합니다. 4절에 소돔사람들이 몰려온 것은 결국 롯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싫어한 이들이 단합하여 찾아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사회에서 남자가 남자를 욕보이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모멸감을 주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가 9절이죠. 이들이 몰려와서 나그네를 욕보이려 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스려고 하는지라.”
당시에 법관이라하면 결국 최고지도층이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롯은 하나님의 땅과 같은 그곳에서 철저히 성공을 위해 살고 있었고, 거의 그러한 위치에 도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돔사람들에게는 위협이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계기로 롯을 끌어내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에도 롯은 여전히 승리를 탐합니다. 나그네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딸마져도 쉽게 내버리는 것을 보면 롯의 이러한 생각을 알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 이 딸들이 결혼할 사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롯이 왜 이딸들을 소돔사람들에게 넘겨주려고 했겠습니까? 이일이 딸을 버릴만큼 롯에게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성공의 끝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롯이 그와같은 이기심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급히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그리고 속히 이곳을 떠나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성을 멸하려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이들의 말이라면 들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롯은 동틀때까지 밍기적 거립니다. 천사는 계속 제촉하지만 롯은 계속 지체합니다. 왜요? 그는 처음부터 소돔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악함으로 대변되는 소돔과 고모라였지만 그에게 이곳은 자신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은 마지막 떠나는 그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으로 가라는 천사들의 말에 소알이라는 작은 성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롯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없는 산에서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아무리 작아도 성이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롯의 실제 마음입니다. 육신의 눈이 멀어 멸망의 긴급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 미련을 못버리고 있는 것이 바로 롯입니다. 그런 그를 왜 하나님은 살리십니까? 29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하여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롯의 경건함이나 의로움이 아니라 아브라함과의 약속과 그의 기도, 롯을 생각하는 아브라함의 그 마음때문에 하나님이 롯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앙의 원리 한가지를 발견합니다.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믿음있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메달리고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 중보기도를 기억하시며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환난속에서도 구원함의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신앙의 원리는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은 우리를 점점 더 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롯의 아내는 소돔의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미련이 결국 롯의 두딸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산속 동굴에서 롯의 딸들이 아버지와 상간하는 이 사건은 롯의 아내가 있었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계획입니다. 즉 창세기는 성도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미련을 두었을때 그 결과가 죽음임을 롯의 아내를 통해서 보여주며, 그 삶의 과정이 결코 온전하지 않음을 롯의 두딸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노아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있습니다. 구원함을 받았지만 결국 자녀들의 죄로 말미암아 구원함의 은총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상황에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라, 주님과 동행하라,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분의 뜻을 따라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아브람은 바로 이 요청에 신실히 응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응답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반면에 롯은 자꾸만 세상에 미련을 둡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과 부유함만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와도 그 미련 때문에 지체하고 조건을 걸어가며 하나님과 딜을 하려합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구원의 은총은 경험하지만, 온전함의 길을 걸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받는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함이 옳겠습니까? 오늘 하루 살아가실때 이 질문에 답을 하며 하나님의 선택을 나의 것으로 삼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