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아 하나님의 은혜로 (310장)
고린도후서 13장 “강함을 이기는 약함”
13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다시금 방문하겠다고 말합니다. 1절입니다. (고후 13:1, 개정)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안 갈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다시금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 합니다. 분명 그 안에는 분명히 바울과 불편한 사람들이 있어요. 2절입니다. (고후 13:2, 개정)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이 좀 강하게 말하네요. 전에 죄 지었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데, 이번에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분을 이기지 못하여 씩씩거리며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의 강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 받은 가장 큰 상처는 무엇입니까?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거에요. 그렇다면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이 강해 보이지가 않았어요.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다면 바울은 마땅히 강한 모습을 모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강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약한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시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모습 어디에서 강함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신 예수님은 약함 그 자체에요. 그런데 그 약함 속에 강함이 있어요. 그 약함 속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말합니다. (고후 13:4, 개정)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약함’과 ‘강함’, 이 역설 속에 우리 신앙인의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 간절하게 기도하십니까? 어려울 때 기도하죠.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가 나옵니다. 약할 때 기도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바닥을 쳤을 때, 아무런 힘도 없을 때, 그때 하나님과의 진솔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약한 그 때, 가장 강하신 주님을 경험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보기에 바울은 약한 자였을지라도, 실상 바울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약함과 강함의 관계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알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관계를 깨닫는다면, 사울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겠지요.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5절입니다. (고후 13:5, 개정)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믿음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확증하라고 요구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들을 믿지 않는다면 버림받은 자들이 되고 말겠지요. 그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자신들을 바라보겠지요. 그리고 자신들이 진리로부터 떠났는지를 점검하겠지요. 같은 식으로 바울을 바라보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그 진리로부터 떠났나요? 그럴 리가 없죠. 그 진리를 바울이 전해줬는데요.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말합니다.
(고후 13:6, 개정)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진리의 기준에서 보면 바울은 의심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람이지요.
바울은 자신이 사랑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 부인을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그곳에는 분명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억울하죠. 분하기도 하겠죠. 바울이 강하게 나가려면 얼마든지 강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끝까지 자신의 강함을 포기합니다. 10절입니다. (고후 13:10, 개정)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교회가 온전하게 될 수 있다면 바울은 자신의 강한 모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마무리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형제라고 부릅니다. 11절입니다. (고후 13:11, 개정)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바울에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누구입니까? 바울의 사도권적위를 의심했던 자들이고, 외부 침입자의 말에 홀려 바울을 문전박대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상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덮고 그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13절에는 우리가 예배시간에 많이 듣는 축도문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고후 13:13, 개정)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이러니해요. 이 아름다운 축도문이 누구를 향해 기록되어 있습니까? 바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이 축도를 합니다. 여기에는 사실 우리의 모습도 담겨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화해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교제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끝까지 축도의 손을 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