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고린도전서 1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Mar 0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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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예수는 나의 힘이요(찬송가 93장)

말씀 : 고린도전서 1:1~31


오늘부터 함께 묵상한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나 후서를 읽으실때, 그리고 신약의 서신서를 읽으실때 한가지 염두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편지의 수신처에 대한 문화적인 이해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한 지역의 교회나 성도들이 1차 수신자이기에 그들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을 먼저 살펴보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보다 더 풍성하게 해주고, 보다 본질적인 해석을 할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런의미로 고린도서를 묵상할때 먼저 1세기 고린도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세기 고린도는 인구 6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였습니다. 특별히 항구도시로서 육로와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린도는 상업이 번성하였고,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급속한 성장, 밀려드는 사람들, 발달된 교통과 다양한 종족들.. 선진 문명으로 여길수도 있지만, 고린도는 이러한 환경이 타락과 향락의 도시로 물들게 합니다. 많이 들으셨던 것처럼 고린도식으로 산다라는 표현은 당시에 부도덕한 행동을 계속행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통용될정도로 도시 전체가 향락과 무절제와 방탕과 사치가 심했습니다. 이러한 퇴폐적인 문화는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서 아프로디테여신을 모시는 신전에는 향락을 부추기는 여사제가 2000명이 넘게 있었다고 전해질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고린도였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도시 전체가 복음과 상관없어보이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고린도가 가지고 있는 그 문제들이 고스란히 교회에서 반복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한가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열심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열심은 있는데, 그것이 선한 결과로 드러나지 않고, 문제만 일으키고 있는 것이빈다. 오늘 말씀에서는 처음 인사말임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11절을 보시면 교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바 그리스도파 이렇게 나뉘어져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내용을 보면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는가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통성의 싸움입니다. 내가 더 바르고 더 고귀한 신앙을 가졌다고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은 있지만 그러한 열심은 자꾸만 마찰이되고, 다툼이되고 분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고린도교회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계속되고 있었을까요?

계속 말씀을 읽으면 그 이유를 알수 있습니다. 함께 22절~24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교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옛습관에 여전히 빠져 있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일상입니다. 그들은 항상 증거를 요구했고, 하나님은 그러한 기적을 통해서만 나타난다고 여겼습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통한 탐구가 몸에 베여 있습니다. 논리적인 말과 화술이 그들의 평가 기준이었습니다. 바울을 이와같이 유대인과 헬라인의 일반적인 성향을 비교하면서 이와 같은 것이 복음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도 모르는 옛습관이 옛모습이 복음의 진수를 가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가리고 있습니까? 유대인은 복음을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고, 헬라인은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한마디로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종교적 열심은 있습니다. 그러니 다르기에 떠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나에게 익숙한 것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내 생각으로 신앙을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이 복음을 복음답게 하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한것 같고, 버려야하는 것같고, 비논리적인 것같으나 그것이 능력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유대인이 바라는 표적의 실체요, 헬라인이 찾는 지혜의 실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세상으로 복음을 해석하려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 향락과 즐거움을 복음이 주는 자유함과 기쁨으로 도치시킨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본이 변화되어 완전한 새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바뀌지 않은 근본위에, 종교라는 이름의 열심과, 자기만의 생각과 판단을 덧입혀서 새사람처럼 행동만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게보면 고린도교회의 성도와 우리는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도 아주 많은 부분, 내 틀은 그대로 두고 신앙적인 행동 몇가지를 함으로 제자되었다 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거울삼아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틀을 깨고, 예수님의 틀을 입어야 합니다. 미련한 것들을 일부러 택하여 자만감에 쌓여있는 우리를 부끄럽게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만나야 합니다.

고린도서는 그 방법을 우리의 삶에서 찾으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갈때 우리는 주님의 그 능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드러낼때 우리는 그제서야 옛습관을 버릴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이곳 싱가폴에서 주의 말씀을 실천하며, 주의 십자가를 담대히 지고 따라갈때 우리는 그제서야 하나님의 지혜를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때 이 말씀 의지하여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또한 그 십자가를 드러냄으로 표적과 지혜로 대변되는 우리의 옛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예수님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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