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사도행전 20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Feb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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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찬송가 406장)

말씀 : 사도행전 20:1~38


오늘 읽은 말씀에서 핵심을 이루는 중요 사건은 17절에서 부터 시작되는 사도 바울의 고별설교 말씀입니다. 25절에서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지금 이시간이 마지막의 시간이기 때문에 모인 모든 이들의 마음에 슬픔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37절과 38절이 이 분위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모두가 울음으로 근심으로 바울을 떠나보냅니다. 이 엄숙한 분위기가 오늘 말씀 전체에 흘러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22절과 23절의 말씀을 보시면 바울은 정확한 사건은 모르지만 최소한 그가 잡히고 환난을 당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망가야죠.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16절 말씀을 보시면 오히려 바울은 그 걸음이 늦혀지지는 않을까 우려하며 더욱더 급히 달려갑니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 닥쳐질 그 환난은 22절의 바울의 고백처럼 성령하나님의 계획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분명 고난과 핍박의 길이요, 다시는 이 전도여행을 할 수 없는 마지막 길임을 알지만 그는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갑니다. 아니, 혹여라도 걷지 못할까봐 더 급히 걸어갑니다. 왜 일까요? 왜 바울은 바보처럼 이 길을 걸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 길을 걷지 않고 더 위대한 일을 도모하거나 더 먼나라로 복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을텐데 왜 바울은 이 길을 걸어갈까요?

이 의문이 오늘 본문을 읽으며 가시지 않았습니다. 29절은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떠난후에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서 양떼들을 즉 성도들을 힘들게 하고, 분열을 일으키게 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안떠나면 되잖아요. 3년을 훈계하였으니 더 훈계함으로 더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면 좋잖아요. 에베소 교회와 기타 다른 교회들도 건강해지고, 바울 역시 선교의 사역을 더 감당할수 있으니 더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의 마지막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갑니다.

왜 일까요? 왜 바울은 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수 있었을까요?

누가는 그 이유를 유두고의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두고의 사건은 그냥 보면 말씀을 듣다가 졸아서 목숨을 잃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진심으로 듣지 않으면 안된다던가, 주의 말씀에 경청하지 않으면 큰일이 생긴다는 이야기로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마지막 고별설교와 연관해서 유두고의 사건을 보면 왜 바울이 그 길을 걸을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유두고가 죽기전의 상황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급히 떠나려고 했기에 밤늦게까지 강론을 합니다. 8절을 보시면 그래서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윗층으로 갈수록 산소의 양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등불이 이산화탄소를 내뿜기에 그렇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물리적으로 산소도 적습니다. 그럼 당연히 졸음이 올수 밖에 없습니다. 유두고가 게으르거나 약해서가 아닙니다. 환경이 그를 졸음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러한 환경외에 한가지 정보를 더 줍니다. 그것은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람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유두고가 어르신이나 아이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젋고 건강하니 위험하지만 창틀에 앉은 것이라고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이 유두고는 밤늦은 시간까지 말씀을 듣고 싶어했고, 모인 사람들까지 배려하려한 신실한 청년임을 알수 있습니다. 악하거나 게으르지않고 오히려 신실한 청년인 유두고가 이유를 찾기힘든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어떻게 교회공동체에서 해석됩니까? 함께 12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이 청년으로 성도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환경과 상황때문에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적인 아픔으로 이 사건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소망으로 확대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예루살렘길이 이 유두고의 이야기와 같은 겁니다. 분명 이 길은 유두고의 죽음처럼 보이는 길입니다. 주를 위해 그렇게 헌신을 한 바울이 죽음의 한발 한발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것은 그 걸음의 끝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두고를 살리셔서 이방땅에 세워진 교회와 교회의 성도들을 위로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바울의 이 마지막 걸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원토록 위로하실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걸음을 힘있게 걷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마음이 32절입니다. “말씀이 나를 든든히 세웠고, 나를 거룩하게 함으로 기업이 되게하셨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바울에게 넘쳐났기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걸음이, 그리고 로마로 압송되는 그 걸음이 소망의 한걸음 한걸음이 되었던것입니다. 그의 인생을 주의 말씀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도 유두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과 비슷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힘듦이 생기고, 주님께 매일 매일 나아가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힘들어 하지 맙시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에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도구로 바꾸어 주시고, 소망의 기업으로 변화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확신하며 오늘 하루를 바울처럼 끝까지 달려가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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