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십자가를 질 수 있나(461장)
마가복음 8장 “기적”
예수님께서 하루는 벳새다라는 곳에 가셨습니다. 어촌 마을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맹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맹인을 고쳐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언제나 그러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을 고쳐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소 의아한 행동을 하십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막 8:23, 개정)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좀 이상하지요. 왜 마을 밖으로 나가셨을까요? 마을에서는 예수님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다 마다하시고 사람을 피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8장 11-12절을 보겠습니다. (막 8:11-12, 개정)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는 묻지요. ‘당신 지금 한창 인기있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온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기적을 좀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 그리고는 그들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수없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 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나요? 칠병이어 사건이었습니다.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이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8장 2절 3절을 보실까요? (막 8:2-3, 개정)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나 인기를 위해 기적을 사용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능력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맹인에게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안수하십니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는지 물어보십니다. 24-25절을 볼까요? (막 8:24-25, 개정)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참으로 이상한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눈에 안수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보이는데 제대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를 하십니다. 그러자 비로소 이 맹인이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상하죠?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 모든 기적을 한 번에 다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예수님께서 한 번에 다 안 끝내시고 두 번에 걸쳐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깨우쳐주고 싶은 것이 있으셨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라 그 뒤에 더 분명한 것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시지요.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하느냐 물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다,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더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그 정도로만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저 기적을 일으키는 선지자 정도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다른 사람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내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거다라고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34절입니다. (막 8:34, 개정)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시라고 고백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죠.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에 관심이 많았죠.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이라든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는 기적이라든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기적에는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기적에는 사람이 몰리지 않습니다. 그 기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적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 선택한 길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설명도 할 수 없지만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편한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기 편한대로 살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열망이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납니다. 세상에 좋은 게 얼마나 많습니까? 먹고 보고 즐기고 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 마음 가운에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놀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들의 십자가를 아무리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겠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힘주시기에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하나님 의지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에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기도제목
1. 주일예배를 위해서
2. 이웃초청잔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