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288장)
마태복음 21장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마태복음 26장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긴 장 같아요. 26장부터 27장까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26:2, 개정)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지금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날 이런 일이 있었죠. 예수님께서는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 어떤 여자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향유가 300데나리온이라고 설명합니다. 성인 남자 일년 연봉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비싼 향유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화를 냈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더 좋아겠다고 화를 냅니다. 언 듯보면 굉장히 의로운 것처럼 들려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들과 항상 함께 있지 않느냐?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자가 나에게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름 모를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물론 이 여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몰랐을 겁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했지요. 제자들은 한 술 더 뜹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지요. 은 삼십이란 돈은 종 한 사람에 대한 보상금 정도입니다. 이 돈이 있으면 남은 인생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그런 돈도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자기의 스승을 팝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 모든 사실을 아시죠. 그래서 유월절 만찬 때에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유다는 끝까지 자신을 속입니다. 25절입니다. (마 26:25, 개정)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대답은 유다만 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판 제자를 보는 그 심정이 어떨까요?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모두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 갈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열성적이었던 베드로는 말하죠.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오늘 밤, 뭐 다른 날도 아니에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말합니다. 35절입니다. (마 26:35, 개정)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어떻게 됬을까요?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죠. 베드로의 이 부인은 상당히 굴욕적인 상황입니다. 누가 베드로에게 질문합니까? 한 여종이 물어봤습니다. 당시는 신분 사회입니다. 베드로는 자유인입니다. 물어본 사람은 여 종입니다. 종들은 자유인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이 종은 그냥 무시하거나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닌 종이 한 말에 베드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마 26:74, 개정)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경멸하는 단어지요. 언제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지칭한 적이 있습니까? 비참하게도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어떤 제자는 예수님을 팔았고, 어떤 제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이제 혼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공회 앞에 섭니다. 재판을 받기 위해서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습니다. 죄명은 뭐였을까요? 신성모독입니다. 나중에 로마의 총독에게 재판받을 때의 죄명과는 다릅니다. 여기서는 신성모독입니다. 증거를 찾으려고 거짓 증인도 세우고 계속 예수님을 추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죠. 그러다가 대제사장이 이 질문을 하자 딱 한번 대답하십니다. 그 질문 이겁니다. 63절을 보겠습니다. (마 26:63, 개정)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즉, 네가 말한대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 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한가지 놓치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이십니다. 억울하게 재판받고 조롱을 받고 있지만, 그 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분의 일을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멸시와 고난을 받으셨을까요?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도망가고 부인하는 제자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자주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하며 살고 있지만,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 붙잡혀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제목
1. 주일 예배를 위해서
2. 이웃초청잔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