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아 하나님의 은혜로 (310장)
요나 1장 “나의 뜻 하나님의 뜻”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2절입니다. (욘 1:2, 개정)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예,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타락했다. 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니느웨로 가면 되겠죠.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욘 1:3, 개정)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갑니다. 도망합니다. 다시스가 어디였을까요? 확실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날의 스페인 남쪽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곳은 당시 가나안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 중에 가장 서쪽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요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고대 기록에 의하면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1년 이상도 걸렸다고 합니다. 비교적 가까이 있는 니느웨를 놔두고 가장 먼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왜 이렇게 고생스럽게 도망을 갈까요?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거든요. 요나에게 있어서 니느웨에 살고 있는 앗수르 사람들은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역사적인 갈등과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회개를 촉구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떨 때는 쉬워요.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할 때에 그렇죠. 그런 건 굳이 지키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말씀대로 삽니다. 그런데 언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생각이 다를 때에 어렵죠. 우리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죠. 나름대로 합당한 논리도 있고 합당한 근거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당황스럽지요. 이해가 안 가죠. 때로는 도망가고 싶지요. 그렇게 도망을 갔는데, 일이 잘 풀려요. 오늘 말씀 3절 중반부부터 볼까요? (욘 1:3, 개정)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배 운행 시간을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갔겠습니까? 무작정 도망 간거에요. 그런데 마침 그 멀고 먼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그렇게 순조롭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갑니다. 우리도 간혹 하나님의 뜻을 떠나 행동합니다. 도망갑니다. 처음에는 조금 마음이 불편한데 별다른 일이 없어요. 일도 순조롭게 잘 풀립니다. 이렇게 해도 되는가보다 하고 그냥 물 흐르듯 흘러갑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멀리멀리 도망가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큰 폭풍을 일으켜 배를 흔드십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죠.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바다로 집어 던지며 어떻게든 배를 살려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 각각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배는 요동칩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요나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흔들리는 배 안에서 사람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폭풍이 일어났는지 한번 제비를 뽑아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뽑힌 사람이 바로 요나지요. 사람들은 요나에게 너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요나가 말합니다. (욘 1:9, 개정)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재앙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묻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랬더니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져라. 그러면 된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자~ 이제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되겠죠?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3절입니다. (욘 1:13, 개정)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사람들은 요나가 죽는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요나를 살려보려고 노력했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공들은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요나는 왜 도망을 갔습니까? 이방인인 앗수르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도망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 사공들은 자신들이 요나 때문에 죽게 생겼음에도 어떻게든 요나를 살려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역부족이었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자 바다가 잠잠해 집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합니다. (욘 1:16, 개정)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처음에 사공들은 무엇을 두려워 했습니까? 폭풍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여호와를 두려워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도 모르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요나를 만나고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여호와의 능력과 그 분의 살아계심을 경험했습니다. 요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싫어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망가는 요나를 통해서도 그 분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전하지 않고 도망가는 선지자를 제대로 된 선지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격도 한 성격 합니다. 이미 깨진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의 불순종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다시금 순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다시금 니느웨로 가도록 요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요나서 1장을 보다보면 요나는 어디론가 열심히 갑니다. 정말 열심히 갔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네요. 그 방향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아니에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그 방향을 틀고자 요나의 삶에 개입하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어디론가 가겠죠. 물론 우리 두 발로 가는 물리적인 장소고 있겠지요. 하지만 하루동안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어디론가를 향하겠지요. 그 방향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기를 원합니다. 물론 그 방향이 맘에 들지 않을수도 있어요. 불편할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발걸음에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뜻이 있음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하루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주일예배를 위해
2. 출타 중인 교우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