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아모스 3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Jun 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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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찬송가 546장)

말씀 : 사마리아에 내리신 벌


오늘 새벽에 함께 묵상하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아주 무서운 말씀으로 해석되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선포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왜 이런 심판이 선포되었는지보다는 심판의 내용과 그 엄정함이 먼저 다가오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잘 이해가 안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본문을 읽고 있는 우리보다는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강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지금 아주 평온하고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를 향한 신앙의 모습도 아주 완벽해보였기 때문입니다. 풍요로움, 안락함, 부유함 그리고 종교적인 열심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아모스 선지자의 이 외침이 귀에 들어왔겠습니까? 

심판? 그건 악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있는거지…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고, 그래서 이런 복을 누리는데, 무슨 심판이 있고, 무슨 망함이 있다는 말인가? 아마 그런 삶을 사는 정말 나쁜 유대인이 있는가보다…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를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내일 묵상할 4장 4절과 5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열심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율법이상의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이기에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계신 것일까요? 함께 9절과 10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해 이방 민족을 부르십니다. 아스돗의 궁궐은 작지만 이스라엘과 가까워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던 이방민족을 가리키고, 애굽 땅의 궁궐은 당대의 초강대국으로 풍요로움속에 있던 이스라엘이 지향하던 부유함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사실은 고대 근동에서 행해진 이러한 부유함의 상징들은 약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얻은 것이며, 부유한 자들은 이러한 약자를 향한 착취를 정당하다고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데 자신들이 착취한것보다 더큰 착취와 억압이 사마리아에 있음을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큰 요란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종종 전쟁으로 인해 생긴 공포감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9절은 집권자들의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지 공포와 학대가 일상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권력자들이 자신의 부유함을 더 드러내고 더 누리기 위해 약자들을 마음대로 다스리기 위해 수많은 학정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10절에 나오는 포학과 겁탈이라는 말은 정의와 공평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회윤리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를 표현하는 히브리어의 표현법입니다. 포학이라는 단어 하마스는 피까지 흘리게 하는 폭력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겁탈이라는 단어 쇼드는 재산을 약탈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겉은 부유하고 평온해보였지만 그 내면은 부유한자가 더 부유해지기 위해 약자들을 학대하고 겁박하고 여러 수단을 통해 빼앗음으로 사회윤리가 사라지고 불의가 승리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라진 사회윤리가 아닙니다. 사라진 사회윤리가 그대로 인정된 이유입니다. 그것은 가나안종교에 의해 합리화 된 개념입니다. 이유와 동기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성공하고 승리하면 된다는 가나안땅에 편만한 사고가 이스라엘의 근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사고에 하나님이 사라진 것입니다. 결과만 보게하고 그 결과만 좋게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하는 물질적 탐욕과 그것을 뒷바침하는 주술적 종교사상이 이스라엘의 영적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윤리적인 삶이 필요없어졌습니다. 물질을 얻으면 권력과 명예와 삶이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체제의 모순이나 사회의 문제나 권력자의 죄악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누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모스 선지자에게 지금 심판을 대언하게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근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종교행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회에 모순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이상의 삶의 모습이 아닌 그 중심을 바꾸시기 위해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은 특별히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같지 않으십니까? 우리야 말로 특별한 어려움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빈궁함이 없습니다. 이미 많은 복을 받았고, 또 누리고 있습니다.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계속적으로 되집어 보고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는 과연 누가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사사기만 보아도 평화가 있을때 이스라엘 백성은 쉽게 타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과 멀어져서 병들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삶은 평화로웠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평화때문에 내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삶에 평화가 있습니까? 부유함과 넉넉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누림과 동시에, 우리의 중심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누구의 가르침이 담겨있는지 그 사실을 계속적으로 점검함을 통해 우리만을 아시고,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이 우리안에 영원토록 넘쳐남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내일 모레 떠나는 청년부 단기선교팀을 위해서

2. 수요기도회에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