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호세아 9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Jun 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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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464)

제목 : 문 앞에서 기다리는 신부처럼

 

10. 옛적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셨다 나옵니다. 과연 광야에서 포도를 만난다는 마음이 무엇일까 묵상하던 중, 그 밑에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다에 힌트를 얻어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무화과나무는 2년째부터 초기수확을 할 수 있다 나와요. 나무 형태가 갖추어지는 4년 이후부터는 정상수확을 할 수 있고, 일 년에 두 차례씩 약 20년 이상을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딸 수 있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증발량입니다. 증발량이 많으면 뿌리라도 깊게 뻗어서, 땅 속의 수분을 빨아들이면 좋으련만 뿌리도 얕고 가뭄에 약해서 주인은 늘 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럽니다.

 

그렇게 노심초사 밤과 낮으로 무화과를 보살피다가, 2년 만에 처음 맺힌 무화과 열매를 본 주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광야에서 포도를 만나는 기쁨 또한 이와 같으리라 생각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사막에서 만난 포도처럼, 수고한 끝에 처음으로 맺힌 무화과 열매를 보듯이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꼬장꼬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8.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라 여기어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일 시키고 잘 하나 두고 보자의 하나님이 아닌 함께 동역하신다는 말 인데 개념은 잡히지요. 하지만 나를 동역자로 봐주시는 그 하나님이, 믿음 생활을 계속 해온 우리도 받아들이기가 쉽질 않습니다.

 

이렇게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동역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그들은 17절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의 동역함을 무시하고 듣질 않았습니다. 이에 그들을 버리시겠다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저의 질문은요. 이스라엘을 파수꾼으로, 광야에서의 포도와 무화과나무 보듯 보시는 분이 쉽게 그들을 버릴 수 있으실까..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를 가지고 하나님은 과연 그 뜻을 거스르실 수가 있을까..?입니다. 만약 거스르셨다면 예수님도 보내지 않으셨겠지요.

 

보통 우리가 믿고 있는 회개란, 내가 지금까지 지었던 모든 죄에 대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눈물로 용서를 구하고 과거의 어리석은 행동들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자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때가 되면 종교와 상관없이 철이 들어 과거의 행적들을 후회하며 고치기도 합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죄와 음행과 우상숭배는 우리의 윤리. 도덕적인 수준을 말하질 않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내가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혹여나 안다면 아는 그것으로 열심으로 그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그것입니다. 천국문은 우리가 세운 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원할지라도 열릴만한 문이 아닙니다. 두드려서 열릴 문이라면 애초부터 언약을 세우지 않으셨겠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선지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수준은 그 어떠한 기독교인들보다 고상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삶의 지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판단할 민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창조주가 대신 죽어 그들에게 열어놓은 언약의 문의 은혜를 놓쳐버렸습니다. 이 문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으로 열리질 않습니다.

 

그 문 앞에서, 주인의 말을 기다려야 할 뿐입니다. 신랑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술람미 여인처럼 흡족하게 먹고 마셔야 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금의 우리는, 그 음성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생명의 문이 아닌 초조하고 급한 마음으로 자신만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죽음의 문에 쉽게 들락날락 거립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서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음행이요. 간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에게만 집중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죽으심으로 열어놓으신 그 언약의 문 앞에 사랑함으로 애뜻함으로 신부처럼 기다리기 보다는, 다른 문을 기대합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들에 쉽게 눈길을 돌리지요. 그렇게 신랑이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 눈 돌리는 음행이 우리 삶에는 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 음행을 도저히 피할 길은 없지만, 즐거워 하지 않을 방법은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목 마를까 물을 내시고, 아침에 손수 밥해 먹는 것이 힘들까봐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아는 그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밤낮 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그것입니다. 그렇게 저와 성도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일평생 그런 사람에 걸맞게 사는 저와 성도님 되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께 파수꾼이요. 동역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복이요. 감사요. 기쁨이 되는 지 말씀으로 만남으로 환경으로 경험되어지는 복된 화요일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