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14장)
에스겔 23장 “의미있는 사랑”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삽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사랑을 가치 있게 할까요? 사랑의 크기가 그 사랑을 가치 있게 할까요? 아니요. 물론 사랑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그 가치를 결정할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사랑의 가치는 사랑의 대상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하는 사랑의 가치가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신랑과 신부에 자주 비유하여 설명되곤 합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요. 하나님과 교회, 혹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신랑과 신부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지요.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11:2, 개정)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구약의 배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랐을 때, 그들의 사랑은 가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이 영적 간음을 저지릅니다.
본문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두 여인의 이름은 오홀라와 오홀리바입니다. 언니인 오홀라는 사마리아를, 동생인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먼저 배경 설명부터 드리자면,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시대까지 하나의 나라였지요. 그러다가 솔로몬 다음에 두 개의 나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북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유다라고 불립니다. 비록 나라는 둘로 나누어졌지만, 이 두 나라는 동일한 신앙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 모두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주인을 따르지 않고 다른 것을 따랐지요.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겔 23:2-3, 개정)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할거 없이 애굽을 따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먼저 통일 왕국 시절에 솔로몬은 바로왕의 딸들과 정략적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왕국을 연 여로보암도 애굽의 후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할거 없이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존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5절부터 21절까지 본격적으로 이 두 자매, 즉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적 음행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는 언니인 오홀라가 앗수르와 연애를 합니다. 5-6절입니다. (겔 23:5-6, 개정) 『[5]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6]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를 사모했습니다. 이유없이 사모하지는 않습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은 자색 옷을 입은 고관입니다. 감독입니다. 젊습니다. 말 타는 자들입니다. 고대에서 자색은 왕권을 상징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해볼까요? 아주 좋은 집안이고 대기업의 임원이거나 정부의 주요 요직에 있는 젊고 잘생긴 남자가 좋은 차를 타고 옵니다. 다 가졌네요. 멋지죠? 혹 할만 하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를 볼 때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좁디 좁은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에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앗수르는 다 가진 나라였어요.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이 믿는 신은 화려하기 이를 데가 없었죠. 그러나 앗수르를 사모했던 북이스라엘의 말로가 어떠했습니까? 9-10절을 보면, (겔 23:9-10, 개정) 『[9]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10]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 사모하던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남유다는 어땠을까요? (겔 23:11, 개정)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오히려 더 빠져들었습니다. 14-15절에 보면, 남유다는 앗수르 뿐만 아니라 바벨론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언니처럼 크게 배신을 당하고 아픔을 겪었습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비유는 이런 의미입니다. 두 왕국 모두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외세에 의존해서 그들의 장래를 보장받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존하며 그것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이 의지하던 것의 침공을 받습니다. 사랑하던 자로부터 처절하게 배신을 당합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 두 이름은 ‘오헬’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오헬은 ‘천막, 성막, 혹은 성소’를 의미합니다. 그 이름 자체서 하나님께 속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거할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열정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는 사랑하며 삽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 겁니다. 가치 있는 사랑을 할수도 있고요. 아니면 무가치할 뿐 만 아니라 나를 망가뜨리는 사랑을 할수도 있습니다. 무엇에 따라서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서요. 우리가 올바른 것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은 가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우리를 가치있게 만듭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변하지 않으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2. 카이로스 선교훈련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