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만입이 내게 있으면(찬송가 23장)
말씀 : 내 이름을 위하여(에스겔 20:1~49)
오늘 말씀은 조금 길지만 내용상으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31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그리고 32절에서 44절까지는 이스라엘의 변화에 관한 소망의 말씀으로 나누어 볼수 있습니다. 특히 31절까지의 내용은 시편 106편과 아주 유사합니다. 애굽과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출애굽 2세대들의 모습과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비슷하게 그려있습니다. 먼저 시편 106편에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의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더욱더 강한 빛을 비추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때문에 이 시는 밝음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증거로 4절과 5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바라보시며, 함께하시려는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시편 106편의 말씀은 죄속에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주님때문에 소망을 얻을수 있음을 찬양하는 희망의 노래로 불려졌습니다.
하지만 오늘 에스겔서는 상황은 같지만 분위기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나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예 단절을 선언하십니다.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맹세까지하시면서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시편의 시인이 항상 팔벌려 다가오시는 주님께 달려갈때 소망을 얻은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하나님이 등장하고 계십니다. 그이유를 에스겔서는 이스라엘이 온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저항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고 그곳에서 살아가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시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행해진 언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언약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며 출애굽기 6장에서 모세에게 재확인 시켜주셨던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큰 민족으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약속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양편에서 신실하게 지켜야 하는 목숨으로 보장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이 약속을 이행합니까? 함께 8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은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애굽의 수많은 우상이었습니다. 강대국 애굽의 젖줄 나일강과 연관된 수많은 잡신들을 아버지이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의 신들을 10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앞에 무릎꿇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을 다시 주께로 끌어 당기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 이유를 9절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즉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이 일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언약이란 상황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위해서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상호약속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자꾸만 약속을 떠나고 있고, 하나님만 홀로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1절까지의 말씀은 이러한 모습이 출애굽때와 같이 믿음이 연약하였을때만이 아니라 훈련중인 광야에서도, 훈련이 끝마쳐진 때라고 할 수 있는 가나안 정복의 시기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21절과 22절에서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려 진멸하려 하셨지만 주님의 이름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손을 막으셨다고 하십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16절과 2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은 우상을 따르고 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규례를 없신여기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지 않고 주의 날을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경고와 수많은 타일름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언약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31절의 말씀처럼 자신의 자녀를 화제로 드리는 반인륜적인 일을 스스럼없이 자행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더이상 이스라엘의 요청과 기도를 거절하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관심, 하나님의 매몰찬 거절,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저주이지만 오늘 에스겔서는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33절의 말씀 끝에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 능한 손과 편 팔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실때에 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신명기 4장 34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강한 손과 편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처소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에스겔에서도 같은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반드시 다스리신다. 반드시 이끌어주신다 반드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단 이제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로 이스라엘이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있는 수많은 죄성들을 제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선행하심으로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더 강력하게 이끄시겠다는 선언이십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겠다는 의지적인 선언이기 때문에 오늘의 말씀은 저주처럼 보이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리 엄격해지셨는지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말해도 안들으니까, 야단쳐도 듣지 않으니까, 큰 화를 주셔도 자꾸 다른 생각을 하니까, 이제는 우리의 돌이킴을 기다리시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바꾸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인간인 우리에게는 큰 아픔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준은 아주 엄격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고 모진 세월을 나라없이 살아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주가 아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위해, 우리의 거짓과 더러움을 완전히 벗겨내시기 위해 택하신 마지막 방법이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소망을 발견하심으로 나만을 바라보시며, 주의 품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것을 제일 원하시는 주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나아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1.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고난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고, 승리의 주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2. 수요기도회를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