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 예레미야 17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Jan 05,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찬송가 : 주안에 있는 나에게(370장)

제목 : 유다의 죄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오늘 말씀은 유다의 죄가 어떠한지를 이야기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유다의 죄가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말은 그만큼 확실하고 명확하게 죄가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유다가 저지른 죄의 깊이가 깊다는 것입니다. 이 죄가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다고 말합니다. 이말을 풀어보면 너희의 마음판과 너희의 제단들의 뿔들에 새겨졌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단의 뿔은 제사장의 위임식 때나 제사장이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릴때 제물이 되는 짐승의 피를 바르는 곳이고,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씩 이를 위해서 속죄제의 피로 속죄해야 합니다. 즉 사람이 저지른 죄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을 다시 회복하는 예식의 중요한 부분이 이 제단 뿔에서 이루어지는대, 이 뿔에 유다 백성의 죄가 새겨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유다백성의 관계가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그 제단의 뿔조차 하나님께 속한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제단뿔이라고 원어에는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시면 그 의미가 더 정확해집니다. 2절은 해석이 명확하게 되지 않는 본문인데 일반적으로 유다 백성의 자녀들이 가나안 종교예식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좀더 자세히는 유다의 자녀들이 그 부모들에 의해 우상숭배에 너무나 물들어 있어서, 약간의 부추김만으로도 쉽게 우상숭배를 하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절에서 말하는 제단뿔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제단을 말하기 보다는 가나안땅에 편만했던 수많은 종교의 제단들과 신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유다의 죄는 단순히 내용을 고치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 근본부터 바뀌고 회복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마지막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강조하시면서 이 회복의 시작에 여호와 하나님이 중심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의 길을 걷고 있는 유다를 향해 하나님은 두가지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5절에서 말하는 사람을 믿고, 육신의 힘으로 살고, 마음이 우상을 향하는 길과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인생을 오늘 말씀은 6절에서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이라고 정의합니다. 간조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용암 밭, 암석사막을 뜻하는 말입니다. 건건한 땅이라는 말은 소금기 있는 땅을 뜻합니다. 땅이 물을 머금을수 없고, 소금기가 있다는 말은 식물이 자라나기 힘든 극한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라날수 있도록 특화가 되어야 합니다. 겉은 괜찮아보이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난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인생이 이런것입니다. 우리눈에는 좋아보입니다. 다가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아둥바둥대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위해 모든 양분을 끌어모아 주변의 모든 식물을 죽여가면서도 자기만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의지하는 인생의 진짜 모습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은 어떻다고 성경이 말합니까? 함께 8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나뿐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이들이 같은 은혜를 누리며 각자의 소명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복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을 삽시다. 더이상 사람을 의지함으로 죄악의 깊은곳에 빠지지 맙시다. 라고 묵상하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 있습니다. 함께 13절과 14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을 떠나는 인생이 흩날리는 흙과 같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14절의 고백을 보면 지금 예레미야가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구원을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역시 고쳐져야하고 구원을 받아야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뿌리깊고 지워지지 않는 죄악에 놓여있는 유다백성이나 예레미야나 같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유다백성이나 동일하게 깊은 죄속에 갇혀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악한것을 정죄합니다. 크게는 한국교회의 실수를 질타하고, 불의한 정치를 비난하고, 악한 상황을 평가합니다. 나는 괜찮은데 내 주변이나 사회가 잘못된것이라고만 여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나에게 있고, 불의한 한국정치의 모습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판은 날카로운데 정작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예레미야는 죄악속에 있는 유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것인가 사람을 의지할것인가? 이 하나님의 질문에 예레미야는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다. 나도 동일한 유다백성입니다. 나도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니 나를 먼저 고치시고, 나를 먼저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지금 예레미야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궁극에 자신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함을 알게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하는 온전한 안식일을 지켜야 함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가지 면에서 기독교가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처럼보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괜찮은데 저기만 그래…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악함이 눈에 들어오고, 불의와 균형잃음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 나에게도 동일한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레미야처럼 먼저 회복과 구원을 간구하며 동시에 그러한 주의 은총을 어두움이 넘쳐나는 그곳에 전달하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세상의 악함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같이 점검하게 하시고, 나로 부터 회복되는 역사가 있게 하소서

2. 수요기도회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