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빈들의 마른 풀같이 (183장)
예레미야 15장 “지나친 낙관주의”
15장에는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사뭇 심각합니다. 복구가 안 되는 상황인거에요. 1절입니다.(렘 15:1, 개정)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여러분 모세와 사무엘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 중재했던 지도자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설령 모세와 사무엘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거두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강력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3절입니다. (렘 15:3,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칼로 벌하고 온갖 짐승들로 멸하겠다는 끔찍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요? 바로 거짓된 신념과 신앙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백성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거짓된 신념과 신앙입니다.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은 ‘평강’을 외쳤습니다. 듣기 좋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된 신념과 믿음에 중독되어 현실에 대한 판단 능력을 마비시켰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심판의 메시지보다 거짓 선지자들이 전하는 ‘평강’을 더 선호했습니다. 오히려 더 갈급해 했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회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말았지요. 6절입니다.(렘 15:6,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8-9절에서 예루살렘의 비참한 파멸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 선포가 흥미롭습니다. 8절입니다. (렘 15:8, 개정)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과부가 나 앞에 바다의 모래보다 더 많아졌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다의 모래보다 더 많다는 표현은 어디에선가 들어본 말 아닌가요? 예,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시면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표현을 역설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언약의 축복을 받는 민족에서 저주를 받는 민족으로 표현합니다. 9절도 볼가요?
(렘 15:9, 쉬운) 『자녀를 일곱이나 둔 여자라도 자녀를 모두 잃고 힘이 빠져 기절할 것이다. 밝은 대낮이 슬픈 어둠으로 변하여 그 여자는 절망에 빠지고 수치스럽게 될 것이다. 유다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적군의 칼날에 죽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아들을 일곱이나 둔 여인도 아들을 잃고 기절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섬뜩한 말이지요. 이 당시에 아들이 많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이자 선물이었습니다. 모두의 부러움을 살만큼 큰 자랑거리였겠지요. 그런데 그 축복이 오히려 더 많은 아들을 잃어버리는 저주로 바뀝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의 허망함을 다시 한 번 봅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면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수치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10절부터 21절까지는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응답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는 힘든 삶을 산 선지자입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평화와 안전을 예언했습니다. 물론 거짓이었지요. 반면에 예레미야는 재앙과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고통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래서 탄식합니다. 10절입니다. (렘 15:10, 개정)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원망하죠. 온 세상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옵니다. 자신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대적하고 저주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위로하시며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11절입니다. (렘 15:11,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심지어 대적자들이 재난 중에 예레미야를 찾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자신 앞에 세워 대언자로 삼겠다고 19절에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로 하여금 고독할지라도 백성들과 동일한 길을 가지 말고 굳게 서서 백성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를 담대히 전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천사들이 밤에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좋은 소식이지요. 반드시 들어야 할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좋은 소식임은 확실하지만 모두에게 환영받는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고독에 처하기도 하고 마음의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심각한 반대와 공격에 직면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그 분이 모든 곤경 속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복음의 현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1. 성탄절 나눔행사를 위해
2. 성탄절 예배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