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당한 어느 가장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실직당한 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아들이 보였다. 평상시 같으면 “너는 왜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하느냐”고 잔소리를 했겠지만, 그날은 잔소리를 할 의욕도 없었다.
그저 게임하고 있는 아들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조금 이상했다. 게임에서 져서 ‘fail’실패이란 단어가 화면에 떠오르는데 아들은 오히려 더 신나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가 물었다.
“너 fail이 무슨 뜻인지 모르니?” “실패라는 뜻 아니에요?” 아들이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뻐하니? 실패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러자 아들이 하는 말이 이렇다. “에이, 아빠도! 게임에서 실패란 ‘다시 한 번 더 해보라’는 뜻이잖아요! 새로 한 번 더 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요!”
아들의 대답을 듣고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었다.
《믿음의 눈을 뜨라》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이 부분을 책 내용 그대로 인용해보자. 좋아하는 아들 녀석을 보면서 아빠는 그만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래, 네가 나보다 낫구나. 실패란 네 말처럼 끝이라는 소리가 아니로구나. 다시 한 번 해보라는 뜻이구나.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이니 오히려 신나는 일이 맞구나.’ 아빠는 다시 일어났다. 다른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아버지의 생각은 틀렸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실직당하고 낙심하여 ‘이제 내 장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 가정은 어찌 해야 하나?’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러나 아들의 말처럼 ‘fail’은 ‘실패’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더 해보라’는 뜻이란 시각도 옳다. 나는 이것을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 적용하고 싶다.
인간적으로 보면 비참한 소식이 계속 들려오는 한국 사회, 한국 교회는 이제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이다.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런 절망적인 시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직당한 가장처럼 다른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새로운 길이 보인다. 여전히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기에 인간의 절망이 곧 하나님의 희망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8)
이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적으로 부흥하던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과 변질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저히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려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것이 바로 호세아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꼭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형편에 빠진 한국 교회와 나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 같았다. 사실 교회와 목회자의 타락이나 범죄와 관련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이 땅에서 목사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울 만큼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힘들고 아플 때에 나를 지탱하게 하고 용기를 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 곳곳에서 여전히 신실하게 눈물로 사역하시는 수많은 선배, 동료, 후배 목회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골의 작은 교회, 지방의 외딴 곳에서 얼마나 많은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한국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름 없는 그곳에서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이런 분들 때문에 한국 교회가 아직도 유지된다고 믿는다.
이토록 힘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말씀대로 목회하려고 애쓰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힘든 중에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그 분들은 오늘도 주님의 길에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다고 고백하신다.
우리 역시 호세아서를 통해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경험하고 맛보게 되기를 바라고 또 소망한다. 그 사랑이 어떤 절망의 자리에서라도 우리를 일으켜주리라 믿는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찬수 / 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