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이사야 23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Oct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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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너 시험을 당해 (342장)

이사야 23장 “두로와 시돈을 향한 경고“


오늘 읽으신 이사야 23장의 말씀은 이사야의 중심주제중 하나인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잘 드러내주는 장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이란 물질적 부요와 권력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결국에는 하나님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고자하는 자를 말하고, 더 나아가면 가난한 이웃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자를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의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교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보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1절에서 경고를 받는 두로가 바로 이러한 교만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두로는 당대에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스페인의 다시스를 오가며 무억을 했습니다. 이 무역의 주 대상이 바벨론과 앗수르 특히 애굽의 상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로는 수많은 나라에서 들어오는 무역품들과 재물로 상당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대의 무역항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보호해준다면 그 어떤 신들도 다 용납을 할 정도로 다양한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볼품없어보이는 이스라엘의 신 하나님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신들을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33절의 말씀에 이런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이처럼 두로와 시돈은 자신들의 교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 밖으로 인도하는 데 앞장섰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로와 시돈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때문입니다. 엄청난 부와 안전한 성읍으로 인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을 유혹하여 진리의 길 밖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두로와 시돈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단순히 이방인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고 계신 경고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죄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두로에게 닥친 이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이사야는 9절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9절)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스스로 멀리하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영화가 자기의 결과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절대로 멸망은 없으며, 영화와 부귀만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서 두로를 몰락시키심으로 인간의 교만하고 오만한 자기충족적인 욕심을 굴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굴복은 결국 그들에게서 오염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보게함으로 교만한 생각을 내려놓고, 우상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돌이켜 주께 돌아오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바벨론과 모암과 유다, 아람, 북이스라엘,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 모든 나라가 바로 이 교만과 오만의 죄때문에 패망과 몰락을 경험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속 찾아가셔서 자신의 하나님됨을 보여주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영광, 그리고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권세로 인해 찾아오신 하나님을 거부한 결과입니다. 오늘 말씀의 두로역시 이런 하나님의 보편적인 세계통치 원칙으로 패망과 몰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교만,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교만, 하나님 없이도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 있다는 그 교만때문에 구원의 손길이 거두어지고 패망과 몰락의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이들을 꺾어서 없애버림으로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교만하여 주를 저버리는 이들에게도 은혜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것이며,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두지 아니라히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17~18절)


두로는 자신의 교만으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때문에 멸망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은 다시금 두로와 시돈을 회복시키십니다. '두로를 돌보신다'는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이 두로를 방문하신다는 말입니다. 직접 찾아가셔서 회복의 은혜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의아한 것은 두로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한을 행한다는 표현입니다. 다시 악한 일, 즉 교만함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음란을 행한다는 표현은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두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즉 이말은 다시금 열방과 해상무역을 할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두로와 시돈을 회복시켜주셔서 이전과 같이 해상무역을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달라진 것은 그 무역에 이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득이 하나님께 봉헌되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무역항에서 교만이 중심이된 도시에서 변하여 하나님께 봉헌하는 도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도시가 될것이라는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아픔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께 눈을 돌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새벽에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평안한것, 부유한것, 근심이 없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때문입니다. 내가 뛰어나서 나의 능력이 대단해서라는 착각에 빠지거나 지금의 여유로움이 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여유를 주신분, 지금의 은혜를 주시고 계신 분이 주님임을 잊지않고 계속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복과 은혜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지금의 삶을 주신 주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영적인 교만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지 않게 하소서

2. 만나주시는 주님때문에 회복을 경험하는 하루되게 하소서

3. 수요 기도회에 한없는 은혜를 부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