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425장)
이사야 7장 “믿음으로”
1절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 북쪽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인 베가가 동맹을 맺었습니다. 르신은 아람의 마지막 왕이었고 베가는 이스라엘의 끝에서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르신왕과 베가왕이 유다의 아하스 왕을 다브엘의 아들로 강제 교체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4절로 6절 말씀을 보시면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침공하여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정복의 계획이 있음이 나오지요. 이에 유다 백성들은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어지럽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3절로 9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의 아들과 함께 윗못 수도 끝에 아하스 왕을 만나러 가라 하십니다. 3절, 그 수도는 예루살렘의 성벽 바로 밖의 세탁자의 밭 큰길,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못은 찾아보니, 예루살렘 근처의 기혼샘에서부터 나온 물을 모아 두는 저수지였습니다. 즉, 아하스 왕이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해서 성읍의 물 공급을 조사하기 위해서 그곳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에 이사야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알야숩의 뜻은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입니다. 즉, 유다는 아람과 이스라엘로 인하여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나 본문의 정황상 알 수 있듯이 유다는 지금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공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지금 놀리시는 것도 아니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두 대국이 작은 나라인 유다 나라를 강하게 밀어붙일 때, 하나님은 그 두 나라를 ‘연기나는 부지갱이’라고까지 묘사해 버리시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아람과 이스라엘은 불이 꺼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서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의 상황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을 만한 것에 이것을 믿음을 가지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을 수 있을 정도의 범위라면 굳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쓸 필요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기에 그렇습니다. 즉,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거지요. 이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합니다. 예수님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하다고까지 하십니다.
바로 10절로 12절에서의 아하스의 행위가 악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징표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요청함으로써 나타나는 기적을 통해서 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라는 거였습니다.
즉, 이를 통하여 북쪽 연합이 유다를 패망시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으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13절의 이사야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하스왕이 이사야가 징표를 제시하겠다는 말을 거절함으로써, 이는 이사야를 보내신 하나님을 거부한 꼴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의 믿음 없음의 악함을 보시고도 하나님은 14절 16절 징표 하나를 건네십니다. 그 징표는 임마누엘이라고 이름 지어진 한 소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앞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아하스 왕의 결과는 이렇습니다. 17절로 25절,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합니다. 아시다시피 아하스 시절 이후 유다는 앗수르 제국에 무거운 조공을 바치는 등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것은 도움이 아니라 괴로움을 받은 겁니다.
이사야 30장에 가면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하기까지 하잖아요. 이에 유다는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구요. 이렇게 끊임없이 앗수르는 유다를 점령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애굽으로부터 앗수르로부터 예루살렘을 구해내십니다. 18절 말씀처럼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심으로 이들로부터 구원해내십니다.
믿음 없음의 결과는 계속 나타납니다. 20절, 앗수르는 삭도처럼 유다의 머리를 밀 것 인데, 이는 굴욕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고대 근동에서 털과 수염을 깎는 다는 것은 굴욕과 깊은 상심을 표헌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농부들은 수확물을 얻지 못합니다. 가시나무와 덤불이 자라날 것입니다. 또한 23절의 그 날은 유다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믿음 없는 인간의 모든 계획은 헛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를 보십시오. 어리석은 농부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풍년을 맞게 된 한 농부가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습니다. 그리고 모든 곡식을 쌓아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우리의 생(生)과 사(死) 까지입니다. 이에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4장 15절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주의 뜻 없이는 우리의 모든 계획들이 악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화요일이라는 동일한 한 날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모든 일에 요구하십니다. 이사야가 26장 3절로 4절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고 말씀했듯이, 모든 일에 주를 의지하시고 그 안에서 이뤄짐을 믿으시어 오늘 하루도 주 안에 기쁘고 즐거운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루되게 하옵소서.
2. 교육훈련 가운데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