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419장)
잠언 30장 “창조주, 그리고 피조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아 시대에 대홍수 속에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벨탑을 지었고, 10가지 재앙과 출애굽을 경험했음에도 광야에서 불평 불만을 내뱉으며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아 제자의 길을 가길 원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늘 이와같이 교만한 모습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인지라 잠시만이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내 육신의 안목과 정욕대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혜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떠한 죄도 짓지 말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제사의식을 통하여 죄를 회개하고 온전하여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기 보다는 그 죄를 주앞에서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를 믿는 신자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러한 삶의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말씀 앞에, 또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원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끊임없이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는 앞서 말한 모든 인간들과 같이 원죄를 가지고 있는 동일한 죄인이었지만 이와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함께 나누실 성경 본문은 잠언 중에서도 아굴이라는 사람이 기록한 잠언으로 전해집니다. 1절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이 본문의 저자가 아굴이라는 것과, 그가 다른 두 사람에게 말하려는 내용인 것임을 짐작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9절까지는 이 아굴의 독백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그는 자신을 인간이 되기에는 부족한 짐승과 같은 존재이며 인간이 되기에는 지혜가 부족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고, 지혜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 온 만물중에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뿐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을 ‘짐승’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을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정말로 자신이 이야기 한 대로 짐승과 같이 미련한 자일까요?
3절을 보면 그는 자신이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아굴의 고백에 근거해 보면 그는 잠언 1장 7절에서 말씀하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 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몇 달전 청년들과 복음서 본문을 묵상하다가, 예수님의 앞길을 막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방 여자였으나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고쳐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예수님의 한 마디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는 독설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청년들 사이에 긴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예수님이 좀 너무하신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간절한 사람에게 저런 독설을 날릴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러나 이 모든 논란들을 결론지었던 것은 옆에서 지켜보시던 한 집사님의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인식하게 되면, 때로는 내가 정말 개 보다도 보잘 것 없는 존재인 것을 시인하게 된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의 그 고백에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이와같이 오늘 본문의 저자는 자신을 짐승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겉 모습이나 사회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간절함과 믿음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하신 창조주 앞에서 연약한 인간은 작은 피조물일 뿐임을 고백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4절은 여섯 개의 질문으로 되어있습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이 본문을 보면, 욥기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욥이, 이제 자신이 처한 상황 앞에서 평정심을 잃고 불평 불만이 섞인 말투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임하여 말씀하십니다.
욥기 38장 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으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물을 네가 보았느냐
욥기서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하심으로 욥의 말문을 막으셨던 것처럼, 오늘 본문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인지, 아니면 저자가 다른 두 사람에게 이야기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이 본문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격과, 인간이 상황을 바라보는 지혜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구절이 아니겠습니까?
저자는 강한 역설적 질문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은 감히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굴은 그 창조자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지 더욱 명확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아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이 ‘순전’라는 단어는 원어적 의미로 용광로를 통하여 제련된, 찌꺼기나 불순물이 전혀 없는 아주 순수한 상태를 가르킵니다. 그러므로 이 순전하고 온전한 창조주의 말씀을 100% 신뢰하고 의지하면 그 분은 마땅히 우리를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어주신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7-9절은 저자가 자신의 남은 생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두 가지 간구의 내용입니다.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그는 자신이 교만해질까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에 한 번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신 것처럼 자신에게도 날마다 일용할 양식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도대체 그의 삶에서 어떠한 경험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실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부러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10-33절까지는 숫자 잠언이라고 불리는 고대 이스라엘 문학의 한 장르입니다.
저자는 이 단락에서 몇 가지 비정상적인 경우를 나열합니다.
그것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경우나 자연현상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경우, 혹은 반대로 특별히 탁월한 경우를 말하기도 합니다.
- 첫째는 10~14절로 사회 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경우
- 둘째는 15-16절로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의 네 종류에 대하여
- 셋째는 17절로 불효에 대한 잠언이고
- 넷째는 18-20절로 네 가지의 기이한 자취에 대하여
- 다섯째는 21-23절로 사회질서를 뒤흔드는 네 가지 예에 대하여
- 여섯째는 29-31절로 위풍있게 다니는 네 짐승을 다루고
- 일곱째는 32-33절로 결론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잠언에서 저자는 자연 세계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를 인간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저자는 이 단락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기존 사회의 질서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온 만물의 조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에게서나 큰 자에게서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나름대로의 배울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제 32-33절에서 본문을 결론지어 이야기합니다.
32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3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아굴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섬 성도님들, 이처럼 우리가 지혜자로 살아간다는 것, 즉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간다는 일은 때로는 매우 고달픕니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때로는 죄악으로 인한 절망 가운데 스스로 포기하고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라는 울타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할 때나 지치고 힘이들 때 하나님은 욥의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멀리 계시는 분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굴처럼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간구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출 때 우리는 아굴처럼, 바울처럼, ‘짐승같은 나 자신’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앞에서 누가 감히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철저하게 주의 말씀을 믿고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만이 순전하며,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할 필요가 없이 온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실 정도로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하고, 날마다 그 분의 말씀을 청종하여, 그 분 앞에서 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주의 청지기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기도제목
1.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2.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3.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