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425장)
잠언 22장 “재물”
잠언 2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1절부터 16절까지와 그 이후인 17절부터 끝절까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앞부분은 1절부터 16절까지는 주로 재물, 가난, 부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절은 이 단락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1절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재물을 많이 가진다는 것은 분명히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더 훌륭한 가치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명예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명예라고 번역되었는데요, 문자적 의미는 ‘이름’을 뜻합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말하지요. 따라서 그 사람의 이름에 붙어 다니는 가치는 더 중요합니다. 돈이 많다고 반드시 명예가 높아지는 것은 아님을 우리 모두는 공감하실 겁니다. 두 번째로는 ‘은총/은혜’입니다. 사실 명예와 유사한데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형성하는 ‘호감/호의’를 의미합니다.
재물에 대해서는 잠언 22장뿐만 아니라 잠언 전체에서 여러 차례 경고도 하고 권면도 합니다. 그 중에 우리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개념이 2절에서 등장합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렇습니다. 부한 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는 것은 현실 세계입니다. 우리가 늘 바로보고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불평도 하고 혹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수도 있지요. 이것은 사람의 노력을 통해서 조금 개선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 수는 있지만, 결코 이 문제가 완벽하게 극복할 수는 없어요. 이러한 시도를 했던 역사의 결과를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적어도 이런 문제를 바라보면서 우리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사실 한 가지를 가르칩니다. 가난한 자든 부자든 다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여부에 따라서 사람을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겠죠. 왜냐하면 가난한 자에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에요. 또한 우리 역시도 동일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16절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특별히 16절에서는 재물을 늘이기 위해 행하는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잘못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든 부자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졌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돕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찾아 볼 수 있지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의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잘못은 ‘부자에게 주는 자’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부자에게 물질적인 것을 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뇌물을 의미합니다.
재물은 이중적입니다. 재물 자체가 선악이라는 가치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돈은 유혹적이다”. 그 자체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나쁜 길로 가도록 유혹하는 존재가 재물입니다. 재물을 잘 관리하도록 기도하셔야 됩니다. 선한 사람이 정말 선하고 귀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말 악하게 사용될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재물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재물을 갖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너무 인색하면 그 사람의 이름에 흠이 가지요. 성경은 재물보다 명예가 낫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재물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너무나 삭막하겠죠. 성경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여호와 경외함을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재물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심고 거두는 원리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무엇을 뿌리는가에 따라 무엇을 거두는가가 결정됩니다.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인심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성경이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만 드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은 게으름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는 아주 냉소적인 말로 조롱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도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13절이네요.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재미있는 핑계거리이죠? 게으른 자를 조롱하는 말입니다. 게으른 자는 밖에 나가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하지 않기 위해 가급적 핑계를 댑니다. 그 핑계가 사자가 밖에 있어서 일하러 밖에 나가면 죽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사자는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거리에 나오지는 않았어요. 따라서 이 잠언은 게으른 자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비판하며, 게으른 자에 대해서 강하게 경고합니다.
잠언 22장 17절부터는 분위기가 조금은 달라집니다. 지혜 있는 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마치 공직에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비단 공직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다스리고 통치하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교훈이겠지요.
17-18절을 통해서 지혜자의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에 적용하라고 교훈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혜를 듣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많은 소리가 난다는 겁니다.
세상에 너무 많은 말들이 있어요. 대부분의 말들은 아무런 가치없는 경우가 많죠. 가십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너무 많은 말을 듣다보니까 정작 들어야 할 말을 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말씀은 17절에서 말씀합니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에 둔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둔다는 것은 단순히 말씀을 지식에 머물도록 하는 게 아니죠. 내 삶으로 그 말씀을 실천하고 내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럼 말씀을 언제 들어야 할까요? 오늘 들어야 합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말씀을 들어야 할 때는 내일이 아니죠. 오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채워야 합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라는 책 제목도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로 우리의 삶을 채우는 것은 내일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해야 할 일입니다.
22절부터 27절까지는 지혜자의 권고가 나옵니다. 22-23절에서는 약한 자를 보호하라고 명령합니다. 앞부분에서도 계속해서 반복한 말씀이죠? 그러나 성경은 약한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된 것까지 보호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법은 공평한 것이지요.
24-25절에서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라고 말합니다. 화를 당하거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 또한 노와 울분의 사람이 될 수도 있지요. 26-27절에서는 보증을 서지 말라고 말합니다. 보증을 섬으로 누운 침상까지도 빼앗길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29절에서는 자신의 일에 능숙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가장 다스리고 통치하기 어려운 것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잠언 말씀에서는 우리의 어떠한 능력보다 우리의 기질을 다스리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채우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도 기도하시는 가운데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채우고 말씀이 삶이 되는 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기도제목
1. 한국 방문 중에 계신 담임목사님을 위해
2. 아버지학교를 위해
3. 주일예배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