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공중 나는 새를 보라(588장)
시편 147편 “세심한 통치자”
시편 147편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기 이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려 합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한 시간이라도 공부를 하신 분이라면 답변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정답은 ‘알 수 없다’, ‘모른다’입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1절에서 말하지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어떤 기독교 학자는 이렇게도 표현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갭, 간극이 있어요. 그런데 그 차이가 무한해요. 그래서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네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알 수가 없으니, 어디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살다가면 그만이겠네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흔히 계시종교라고도 합니다. 물론 저는 기독교를 종교라는 지칭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기독교는 계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는데, 두 가지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한 가지를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자연만물을 통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지요. 그리고 다른 한 가지를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떠한 구원을 이루셨는지 자세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 많이 집중을 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닫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바라보고, 숨쉬고, 살아가는 모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시편 147편에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인은 자연의 온갖 아름다운 조화를 통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절에는 하늘의 별들, 8절에는 구름과 쏟아지는 비 그리고 산에 풀, 9절에는 들짐승과 까마귀, 14절에는 밀, 16절에는 눈과 추위, 18절에는 봄바람이 등장합니다. 마치 화가이신 하나님께서 땅을 캔버스 삼아서 온갖 아름다운 절경과 변화를 그려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람이 대자연을 보면 감탄을 하면서 그 자연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연을 창조하시고 운용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할 말을 잃습니다. 그 앞에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시편 147편에서도 거듭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우선 본문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1-6절은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7-11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인 12절에서 20절까지는 시온을 회복하시고 말씀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합니다.
시 전체적으로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미물에게까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며 경배를 드리는 인간에게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주십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시편 147편 전체에 걸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몇 구절을 통해서 은혜의 말씀을 깊이 나눠보겠습니다.
2절에서 보면 시인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이 표현은 일차적으로는 포로시대 이후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관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대적들의 숱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성전과 성벽 재건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절에 “고치시며(3절)”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위로와 격려의 의미뿐만 아니라 완전한 회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즉, 전인을 온전하게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4절에서는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작은 것 하나하나 세세하게 통치하고 계심을 선포합니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별’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하늘에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경외감을 주기도 하지요. 그래서 고대신화에서는 별들에다가 신화를 투사하기도 했고, 경배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다가갈 수 조차 없는 아득히 먼 실체인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별들조차도 다 계수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만물을 다 통치하시는 분이시죠. 심지어 이름을 부른다고 찬양합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계성을 나타냅니다. 별을 하나하나가 다 주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고백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별과 같이 매우 많은 수가 멀리 흩어져 있어도 그들 한사람 한 사람의 삶이 다 주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암시적으로 알려줍니다.
시편 147편이 이러한 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광대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분께서 들의 꽃 하나하나를 돌보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소 역설적이지요. 우리는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운용하시는 하나님께서 들의 핀 꽃 하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런 모습이 혹시 매치가 되십니까?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신학 혹은 철학이론 중에 이신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한 거에요.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후에는 이 세상과는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는 분으로 이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시계를 만드는 시계공이 있어요. 이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시계가 완성되었으니 시계가 작동을 하겠죠. 더 이상 시계공이 시계를 만지지 않아도 시계 혼자 잘 작동합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한 거에요. ‘그래.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한다. 그분은 위대하신 분이고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다. 그런데 나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다. 나는 단지 그 분이 만들어 놓은 무대 안에서 살아갈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부정하는 생각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18세기 이후에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그런데 시편 147편 말씀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인격적인 관계를 설명합니다.
5절에서 설명하죠.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무궁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이름을 아시고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섬세함이 너무도 자세하게 시편 147편에서 묘사되어 있습니다. 8절에 보니까, 땅에 비를 내리시고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십니다. 9절을 보니까, 들짐승 심지어 우는 까마귀 새끼조차도 하나님께서 먹이십니다. 유대인들의 우화에서는 까마귀들은 새끼를 낳자마자 내버린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이 이것을 염두에 두고 까마귀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까마귀 새끼라는 것은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하찮고 거리끼는 존재라는 거지요. 그런데 가장 하찮은 존재조차도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은총을 내리고 생명을 지키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6:30)” 그렇습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의 삶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오늘도 지키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분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기뻐합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좀 이해가 안 가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운용하시는 위대한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우리 한 명, 한명과 교제하는 것도 놀랍지요. 그런데 그 분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그 분께서 기뻐하신다는 거에요.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찬양을 들으며 기뻐하십니다. 광활한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며 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 하루의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기도제목
1. 청년부 단기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교가 되게 하소서.
2. 주일 예배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동행을 경험하며 기뻐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