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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 인애하신 구세주여 (279)

시편 137거룩한 자존심


시편 137편은 시편 전체에서 이와 비슷한 시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시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시편 137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공동체 애가로 시작하여, 찬송으로 계속되다가 저주로 끝난다.’ 아주 슬프고 어두운 시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시편 137편이 어둡고 슬픈지, 시인은 어떤 배경에서 이 시를 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서 이 시의 배경과 분위기가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 왕이 이끄는 바벨론에게 함락됩니다. 그리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 가지요. 그들은 나라와 성전과 언어와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사실 어느 나라 사람들이건간에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과 암담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은 더 크고 충격적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은 단순히 자신이 속한 국가가 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끈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그리고 이방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았습니다. 예전의 시온을 떠올리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시온성과는 비교할수도 없을 만큼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성벽이나 느브갓네살 왕궁은 전설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이도시는 바벨론의 여러 신들에게 바쳐졌던 신전으로 넘쳐난 곳입니다. 그리고 신전안에는 금에다가 다이아몬드를 박아서 만든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사제들은 신상들에게 음식을 바치고 제사를 올렸지요. 일반 백성들은 일년에 딱 한번 사제들이 이 신상들을 신전 밖으로 가지고 나올 때 볼 수 있습니다. 신상들을 수레에 싣고 행차길이라는 신들만 다니는 도로를 통해서 강으로 이동을 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이 강에서 일 년에 한 번 화려한 신상 구경할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축제일이죠.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유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스라엘 이야기를 많이 해서 이스라엘이 엄청난 나라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 역사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거의 존재감도 없습니다.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후에 페르시아와 같은 나라들이 주도했던 고대 근동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아닌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농사도 잘 안 되는 척박한 광야지역입니다. 이런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당시 최고로 강하고 화려한 바벨론에 갔으니 그들의 문화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어차피 나라도 망했고, 여호와께서도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얼마든지 바벨론이라는 화려한 문명을 쫓으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바벨론의 중심부에서 그들이 붙잡고 가슴 아파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화려한 바벨론의 신상과 신전들을 볼때에, 여호와에 대한 신앙은 소박하고 투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화려함을 쫓기 이전에 진실함을 쫓아야 합니다.

 

바벨론의 강변에서 시인은 너무 비통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시인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둡니다. 이 수금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연주할 때 사용했겠죠. 그러나 더 이상 이 수금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수금을 연주할 수 없는 악사의 비통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비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조롱을 하려고 그러는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온 바벨론 사람들이 노래나 한곡 불러보라고 합니다.

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포로들이죠, 이들은 슬픔에 차 있는데 바벨론 사람들은 좀 신나는 곡을 불러봐라고 말합니다. 아니면 너희들이 옛날 시온에 살 때 부르던 노래를 좀 불러봐라 이런 청을 합니다. 조롱이죠. 시온에서 무슨 노래를 불렀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했겠죠. 그런데 지금 너희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며 조롱을 합니다.

하지만 4절에 나와 있듯이 이방 땅에서는 도저히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지요. 구약의 신앙의 개념에서 이방 땅은 부정한 땅입니다. 이런 곳에서 조롱을 받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할 수 없지요. 비록 포로로 끌려와 있지만 신앙의 자존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용감한 반응입니다. 이미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자신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이스라엘 포로들에 대한 생사여탈권까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포로는 마음대로 사용하는 도구이지 인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어야하는 그런 비참한 존재가 당시의 포로입니다. 그런 포로들이 주인의 명을 거절한다는 것은 생명을 건 행동들입니다. 비록 나라도 잃었고 하나님을 예배할 처소도 잃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잃지 않았습니다.

 

5-6절에서 이러한 시인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5절의 개역개정 번역이 전통적인 번역이긴 한데, 문맥을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새번역)” 6절도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새번역)”

무슨 말입니까? 내가 만약 예루살렘을 잊어버린다면 나는 내 팔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내가 예루살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입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처음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에는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바벨론 제국 생활에 익숙해진다면 예루살렘은 점점 잊혀질 겁니다. 실제로 이후에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다스릴때에 이스라엘 사람들 돌아가도 된다고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진 바벨론에서 그냥 살았지요.

죄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처음에 여호와를 떠나 살때는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경각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요. 여호와를 떠난 삶이 길어지다보면 우리의 신앙은 무감각해집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은 죽어갑니다. 여호와를 기억하고 가까이 하도록 늘 노력하지 않으면 죄로 가득한 우리의 본성으로 인해서 편한 것을 찾습니다. 그리고 편안함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죽어갑니다. 늘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7-9절은 참 껄끄러운 저주를 담고 있습니다. 에돔과 바벨론을 향한 시인의 저주가 담여 있습니다. 왜 갑자기 에돔이 나왔는지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단 날에 형제의 나라였던 에돔은 철저한 배신을 했습니다. 그들은 원수인 바빌론의 편에 붙어서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너무 기뻐했습니다. 심지어 에돔은 바벨론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예루살렘 성을 약탈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에돔 사람들은 유대 남부지역으로 이주해서 살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두매인으로 불린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8-9절은 바벨론을 향한 아주 끔찍한 저주를 합니다. 바벨론이 잔학무도하게 다른 나라들을 정복했으므로 동일하게 당해야 한다는 시인의 바램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벨론이란 하나님의 나라의 원수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원수로서 그 세력이 뿌리 채 뽑히길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137편을 통해서 거룩한 자존심을 느낄수 있습니다. 포로에게 자존심이 있을까요? 나라도 망하고 아무런 힘도 없이 끌려온 포로들에게 자존심이란 없습니다. 살기 위해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토록 비참한 신분에 처해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근본적인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힘으로 나라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신앙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적용하여,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릴수도 있고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과 신앙은 결코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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