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272장)
시편 129편 "고통중에도 소망이 있는 이유"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려 한다’라는 말인데,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과거를 회상할때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과 이 시의 저작시기등을 고려할때 이시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구원받은 후 이스라엘 민족이 과거의 모든 기억들, 즉 고통의 기억 및 반복된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기억을 더듬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시편으로 여깁니다.
시의 표면적인 내용은 여타 다른 시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였고 하나님이 살려주셨다는 내용입니다. 구성적인 면에서는 지난주에 묵상한 시편 124편과 125편과 같아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고 악인과 의인의 갈등과 투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은 125편에서는 ‘악인의 홀’이라는 은유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고, 오늘 본문에서는 실제적인 강제 노동과 수치스러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시의 반복으로 여길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124편과 125편은 고난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라는 중심주제를 담고 있는 여호와 신뢰시이지만 오늘 읽으신 129편은 감사시로 분류됩니다. 즉 비슷해보이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키드너라는 신학자는 본 시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시인은 과거에서 용기를 얻어,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과감한 저항정신으로 원수를 직면한다.” 무슨 말입니까? 시편 124편과 125편에서는 과거의 위기마다 함께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 머물러 있다면, 오늘의 시인은 그 위기의 상황에 함께하신 하나님을 넘어서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동일한 역사적인 사실을 감사함이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더 성숙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는 1절과 2절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124편과 125편에서 고백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악인의 괴롭힘이 있었지만 악인에게 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릴때부터라는 말은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삶의 때를 말합니다. 여러번 괴롭혔다는 것은 오랜세월동안 있었던 수많은 적국의 침략과 전쟁을 말합니다. 애굽왕조로 시작하여 블레셋, 아람 앗수르, 바벨론등의 압제자들의 공격이 있었고,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멸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에보이는 절망이 끝이 아니었고, 그 나라들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압조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인은 1절과 2절의 고백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역사의 그순간에 있었던 고통의 강도는 대단했습니다. 시인은 농사의 은유를 통해 이스라엘이 받은 학대와 고난을 묘사합니다. 3절을 보시면 이렇게 아픔을 묘사합니다. “밭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당시 문학적인 표연에서 밭을 간다는 것은 잔혹한 억압을 상징하는 문구입니다. 성경에서는 미가서 3장 12절에서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된다”는 표현처럼 멸망의 상징을 밭을 갈아 엎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시인은 여기에 더해서 그 고랑을 자신의 등에 내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부분은 당시 농법을 이해하면 도움이 됩니다. 열왕기상 19장 19절을 보시면 엘리사가 농사를 짓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우리나라의 농법과 많은 유사성이 보입니다. 소를 이용해 밭을 갈고 있습니다. 문제는 효율성을 극대회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농부는 소를 채찍질하거나 막대기로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밭을 가는 소의 등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었다고 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내등을 갈아 고랑을 지었다는 이 표현은 그래서 시인과 소를,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소를 대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지금까지의 고통이 마치 학대받는 짐승과 같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과도 같은 삶,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없이 채찍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바로 이스라엘과 같았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짐승같은 삶의 종식을 4절에서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학대받는 짐승과 같았기에 해방을 위해서는 멍에가 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악인의 줄을 끊으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줄이 끊어지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6절과 7절의 고백입니다.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6,7)
영원할것 같은 악인과 원수들의 권세가 실은 지붕위의 잡초처럼 영원할 수 없음을 보게됩니다. 강한 권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깊은 뿌리를 낼수 없는 사상누각과 같은 존재임을 알게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열매는 아무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게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고통의 멍에가 벗겨지고 원수의 무가치힘을 알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의 노래를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15절에 아주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시인이 감사시로 과거의 고통을 노래하는 이유, 그것은 생명을 주시고 승리하신 주님을 만났고, 그로인해 참된 자유와 평강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더욱 더 올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축복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의 말씀을 언뜻보면 부정적인 메시지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절에는 2개의 행이 있습니다. 상반절은 지나가는 사람가운데 그 어느누구도 너희를 위하여 복을 빌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악인을 향한 조롱과 읍소를 말합니다. 반면에 하반절은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복이 있기를 빈다는 말로 제사장이 이스라엘백성들 즉 구원과 승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복이 있음을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감사의 고백과 승리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이 넘쳐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지금의 삶을 감사의 고백으로 주님께 드리도록
2. 인생의 주인이시며 이끄시는 주님을 붙들고 사는 하루가 되도록.
3. 환우와 연약함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