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시편 119편 121~ 176절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May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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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성자의 귀한 몸 (216)

시편 119편 121-176절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


오늘로서 성경에서 가장 긴 119편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양도 양이지만 내용도 다양하고 형식도 다양하기 때문에 읽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형식때문에 내용이 희생된 시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움과 독창성이 결여된 시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바이저라는 신학자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본 시편의 외적 구조때문에 중심주제가 질식되고 있으며, 통합하기 힘든 여러가지 색깔로 짜깁기한 모자이크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본 시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실제로 119편을 읽다보면 똑같은 확신, 기도, 결심을 아무런 변화없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깊이 묵상하면 그 안에 좀더 다양한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시의 방대한 양에 비하면 그다지 깨닫기 힘들정도로 변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러한 최근의 평가와는 다르게 이 시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사회에서 가장 애송되는 시였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쿰란공동체에서 가장 인기있는 시였습니다. 1세기경의 유대교에서는 예배의식을 열어주는 축복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이어주는 어거스틴은 이 시가 너무나도 큰 세계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시편의 다른 부분 주석을 다 마칠때까지 이 시의 주석을 연기하였고, 마지막에도 주저와 망설임 가운데 이 시의 주석작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 명료함, 그리고 충만한 웅대함이 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 시편을 황금의 ABC라고 불렀고, 스펄전은 이 시를 가리켜 “진리의 학교”라고 칭했습니다. 21세기 최고의 변증가로 평가되는 CS루이스는 “이 시편이 모든 시편 중 가장 짜임새 있고 가장 잘 다듬어져 있다. 이 시는 오랫동안 조용한 시간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마치 숙련된 장인이 여라글 즐기면서 만든 작품과 같다.”고 말합니다.

같은 시를 놓고 왜 이런 극단적인 차이가 생길까요? 그것은 시의 겉을 보느냐, 시의 중심을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시의 겉을 보면 의미없는 반복처럼보이고, 쓸데없이 장황하게만 기록된 시일 뿐입니다. 알파벳형식에 맞추어서 억지로 짜맞춘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중심을 보면 이 시에 대한 평가는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스펄전 CS루이스처럼 최고의 정수를 담은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를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하는 중심이 무엇일까요?

이 시가 노래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와 인생의 불협화음에 대한 이중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37절에 정직하다, 142절에 진실하다, 160절에 영원하다는 표현을 들어 하나님 말씀의 완전성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시인의 지금을 인도하고 있는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말씀에 대한 결론으로 172절에서 174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며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이것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현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행한 결단입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현재가 어떻습니까? 주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시인의 지금이 어떻습니까? 121절에서는 박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134절에서는 사람의 박해가 있습니다. 141절에서는 시인이 멸시를 당합니다. 143절은 환난과 우환이 시인에게 미쳤습니다. 150절에서는 악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봅니다. 161절에서는 모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자신을 176절에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정의합니다. 나는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만 시인에게 다가오는 것은 박해와 멸시와 모함과 아픔뿐이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처럼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두려움과 절망속에 살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우리들 같이 않습니까? 성경적인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현실에서 그런 주님을 만나기 힘들때가 있습니다. 성경적인 삶이 더 박해로 다가오고, 모멸로 다가오고 모함으로 귀결될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럼 시인은 어떻게 이 삶을 이겨낼까요?

시인은 현실의 아픔을 말씀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165절)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있다. 장애물은 없다 라는 이 말씀이 시인의 세계관입니다. 이말은 지금의 아픔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픔을 평안으로 바꾸고, 장애물을 도움의 도구로 바꾸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삶과는 상관없는 평강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종으로 살던 요셉이 경험한 은혜가 이것입니다. 이세벨을 피해 도망가던 엘리야가 경험한 은혜가 이것입니다. 도망자로 도망치면서도 말씀을 지킨 다윗이 경험한 은혜가 이것이며,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만난 스데반이 경험한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하루 시인이 누린 현실너머에 있는 이 은혜를 누리길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속에서 누린 이 영적 승리를 누리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힘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오늘의 어려움을 주의 말씀가운데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2. 교육훈련수료생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의 믿음과 신앙이 삶에서 계속 드러나게 하소서.

3. 새로 선출된 8명의 안수집사님과 7명의 권사님을 주께서 이끌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