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묵상 - 아프리카 당나귀

by 김수연 posted Oct 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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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일 정말 못하죠? 다른 아이들보다 빠르지도 못하구, 유리잔 깨먹기나 하구 죄송해요. 사장님. 제가 실은 잘 보질 못해요. 망막색소변성증이라고,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각막이식도 안 되구요. 점점 나빠지다가 결국은 실명하게 된다 하더라구요. 제가 특히 투명한 유리 그릇들을 좀 두려워 해요. 잘 안 보이거든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이 아이의 철썩 같은 믿음 앞에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고 하셨다는 그 믿음 하나로 이렇듯 기쁘게 살아가는 아이, 그래서 성경을 코앞에 들이대고 읽으면서도 기뻐하는 이 아이에게요. 멀쩡한 시력을 가지고도 성경통독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 열심히 해보자" 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 아이는 느린 속도로 설거지를 하고 있고 가끔씩 유리잔 깨지는 소리도 들려오고, 손님이 들고나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카푸치노를 만드는데 우유 거품이 철철 넘치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우유를 따르기까지 하더라구요. 속이 부글부글 우유 거품처럼 끓어 올랐습니다. 그러다 뜨거운 우유 거품이 제 손등에 쏟아지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다가 문득 얻어진 깨달음 하나.
나는 멀쩡한 두 눈으로도 거품을 넘치게 했구나. 난 손등만 잠깐 뜨겁고 말겠지만 넌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며 일했을까. 그 바람에 얼마나 많이 마음이 다쳤을까. 사장 눈치 보느라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선교의 비전을 품고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 사는 아이. 점점 나빠져 가는 눈이지만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실 것을 믿으며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 예배가 고프다며 한밤중에 제 찬양과 기도에 동참해 저와 저의 아들과 이 카페를 위해 기도하던 아이. 제 손등에 흐른 뜨거운 우유 거품을 걷어 내면서 이제야 그 아이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밝은 얼굴 뒤로 남몰래 흘러내렸을 그 눈물이 이제야 제 마음을 적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