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삼상 1:6)
여기서 ‘격분’과 ‘괴롭게 하다’라는 두 단어는 원어로 보면 같은 단어이다. 그러니까 브닌나가 지금 한나의 마음을 격분시키는데, 한나가 격분되도록 격분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브닌나가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
‘고상한 척하는 저 여자, 내 남편의 사랑을 다 빼앗아간 저 여자가 이성을 잃고 격분해서 날뛰는 꼴을 보고 싶다!’
이게 브닌나의 심리이다. 얼마나 인간의 본능을 잘 묘사해놓은 표현인가? 브닌나는 한나가 도도한 척하고 자기에겐 아무 문제없는 척한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무장해제 시키기 원했다.
그러나 브닌나의 이런 태도는 공정하지 못하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남편인데, 한나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나와 브닌나의 결정적인 차이가 발견된다. 지금 한나와 브닌나의 시선의 구도가 어떤가? 브닌나는 증오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한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데, 한나는 똑같이 증오의 눈으로 브닌나를 향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차이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0)
한나의 기도에 브닌나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이 한나의 기도가 더욱 귀한 이유이다.
“하나님, 저를 괴롭히는 브닌나를 혼내주세요! 저 대신 복수해주세요!”
한나의 기도에 이런 내용은 없다. 그저 하나님께 시선을 두며 자신의 연약함을 놓고 기도할 뿐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한나는 인생의 에너지를 쓸데없는 데 낭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꾸로 브닌나는 인생의 에너지를 너무 엉뚱한 곳에 쏟고 있다.
이런 예는 요셉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인신매매를 당해서 다른 나라에 팔려갔다. 그런데 어떻게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요셉은 자신의 에너지를 누구를 미워하는 데 낭비하지 않았다.
성경에는 요셉이 어릴 때 자기를 외국에 팔아버린 형제들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자신을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에 집어넣은 여자에 대한 분노나 증오심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는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 같은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능력을 경험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옆에는 자기를 이해해주고 좋아해주고 허물을 덮어주려는 약 95퍼센트의 고마운 사람들과 자기를 모함하고 밟으려고 하는 5퍼센트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치명적인 결함은 우리를 괴롭히는 5퍼센트의 사람에게 우리 생각의 95퍼센트가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불행한 것이다.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런 사람들이 95퍼센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원리를 발견하고 나니 그것은 나의 과장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 주변에는 고마운 95퍼센트의 사람들, 아니 99.9퍼센트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내 생각과 에너지를 나를 괴롭히는 0.1퍼센트의 사람들에게 머물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영적 깨달음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복음이 우리 안에 깊이 들어가 우리 인생의 브닌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되기를, 그래서 내 인생의 5퍼센트도 안 되는 브닌나에게 집중하느라 하루 종일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기도하고 통곡하며 이찬수 / 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