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모임은 고현동/손승경 집사님이 특별히 집으로 초청해 주셔서, 성경공부를 먼저 하고 식사를 하였는데 (집사님들, 다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오늘은 여러분들이 배가 고픈 관계로 핵심만 딱 집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따라서 금주 요약은 간단히 정리됩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최악의 육체적, 심적 고통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예수의 십자가의 핵심은 아니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을 때, 그 나무는 로마의 처형법으로서의 십자가가 아닌 구약시대의 저주를 가리키는데, 이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을 뜻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육체적, 심적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대속해줄 수 있는 이유이다 (즉, 예수가 겪은 육체적, 심적 고통이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했을 때 그 원어의 의미는 ‘값을 다 지불했다’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으로써 우리를 위한 속죄의 값을 다 치렀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었다.
다음주 경건의 시간 본문: 삼상 3:1-14
여기까지가 지난 제자반 요약입니다.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제가 나누고 싶었으나 시간관계상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나를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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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읽으면서 한 가지 놀랐던 것은 예수를 전하는 사도들의 설교 속에서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를 전하면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고,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임을 여러 번 강조했지만, 막상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친 비유와 교훈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바울이 그의 고별 설교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의 말씀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사도행전뿐 아니라 서신서들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막상 예수님을 직접 마주 대했던 사도들이 예수를 전하며 그 말씀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우선 사도들의 활동 당시 복음서가 아직 쓰여지지 않았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십자가 사건이 워낙 큰 사건이다보니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촛점이 더 맞추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면서 예수의 말씀보다는 권위있는 구약의 메시지를 인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 남습니다. 복음서의 내용이 후대의 창작이 아니라면, 사도들, 특히 예수와 3년간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십자가의 의미가 너무도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가 전한 말씀과 예수의 구원 사역이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만, 내가 죽으려면 삼년이나 남았는데, 무얼하지? 옳지,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좋은 얘기나 좀 해 주다가 가야겠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제자들과 삶을 나누며 가르치고자 애썼던 모든 말씀은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일깨워주기 위한 것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예수의 가르침은 윤리적인 교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모습에서 예수가 공생애 기간 동안 전해왔던 모든 말씀과 가르침이 빠져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나는 감히, 초대교회 시대에 이미 사도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교리화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강렬한 복음의 메시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삶을 단순화하고 축약함으로써 논리정연한 메시아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었을지 모릅니다. 즉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사역을 전하는 대신,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이론적으로 잘 짜여진 교리와 그 틀 안에서 박제화 된 예수를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눈에 보이는 신을 원했고, 약속된 땅에 들어와서는 왕을 얻고자 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의지한 것처럼, 사도들은 정연한 논리로 단장된 십자가의 교리를 전도의 전략으로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그 십자가를 이해하는 기초가 되어야 할 예수의 가르침은 뒤로 미룬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은 초대교회와 사도들의 사역과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박해 속에서도 믿음과 열정과 헌신의 마음을 지킨 초대교회 성도들과 감히 우리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읽고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거기에 비추어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우리로서는, 사도들이 어떻게 예수를 전했는지 차분히 돌아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도 돌아볼 책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예수의 말씀보다 십자가의 교리를 선호한 초대교회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는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우리는 여러가지 교리들을 배우고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타락, 원죄, 구원, 칭의, 성화 등등으로 이어지는 주제들은 특히 형이상학적 주제들인지라 우리는 말에 말을 이어가며 이를 토론합니다. 어떻게 이런 교리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할 것인지 고민하며 노력합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가르쳤던 여러 말씀들은, 우리의 대화와 고민의 주제에 일반적으로 잘 끼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라.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베푼 것이 나에게 베푼 것이다. -
-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고 자선은 남이 보지 못하게 베풀어라. 종교적 위선은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여긴다. -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일관되게 그리고 강력하게 가르친 말씀이며, 전혀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지극히 실제적이고 명료한 말씀입니다. 반면 우리가 전혀 실천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괴리를 놓고 고민하는 대화를 우리는 나누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리에 대해 토론하고 묵상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알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막연하고 모호했던 하나님의 모습이 머릿 속에 깨끗하게 정리되면서 뭔가 더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으로써 더 안정되고 굳건한 믿음과 신앙생활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정점에 놓인 유대교의 질서를 뒤엎는 것이었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모습에도 근본적인 도전을 던집니다. 교리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우리에게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논리적이고 편안한 교리의 가르침이 교회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그래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까지 끊임없이, 절박하게, 안타깝게 우리에게 가르치려 노력했던 그 말씀을 대면하지 않고 그 교리에 담긴 진정한 의미--하나님은 누구이며, 죄란 무엇이며, 구원은 어떠한 얻는가--를 올바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도들과 성도들마저 교리를 예수의 말씀 위에 놓는 오류를 빠졌다면, 나와 같은 사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며, 말씀 속에 숨쉬는 예수님의 도전을 좀 더 진지하게, 좀 더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민해야겠다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최악의 육체적, 심적 고통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예수의 십자가의 핵심은 아니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을 때, 그 나무는 로마의 처형법으로서의 십자가가 아닌 구약시대의 저주를 가리키는데, 이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을 뜻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육체적, 심적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대속해줄 수 있는 이유이다 (즉, 예수가 겪은 육체적, 심적 고통이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했을 때 그 원어의 의미는 ‘값을 다 지불했다’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으로써 우리를 위한 속죄의 값을 다 치렀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었다.
다음주 경건의 시간 본문: 삼상 3:1-14
여기까지가 지난 제자반 요약입니다.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제가 나누고 싶었으나 시간관계상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나를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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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읽으면서 한 가지 놀랐던 것은 예수를 전하는 사도들의 설교 속에서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를 전하면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고,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임을 여러 번 강조했지만, 막상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친 비유와 교훈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바울이 그의 고별 설교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의 말씀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사도행전뿐 아니라 서신서들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막상 예수님을 직접 마주 대했던 사도들이 예수를 전하며 그 말씀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우선 사도들의 활동 당시 복음서가 아직 쓰여지지 않았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십자가 사건이 워낙 큰 사건이다보니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촛점이 더 맞추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면서 예수의 말씀보다는 권위있는 구약의 메시지를 인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 남습니다. 복음서의 내용이 후대의 창작이 아니라면, 사도들, 특히 예수와 3년간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십자가의 의미가 너무도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가 전한 말씀과 예수의 구원 사역이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만, 내가 죽으려면 삼년이나 남았는데, 무얼하지? 옳지,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좋은 얘기나 좀 해 주다가 가야겠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제자들과 삶을 나누며 가르치고자 애썼던 모든 말씀은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일깨워주기 위한 것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예수의 가르침은 윤리적인 교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모습에서 예수가 공생애 기간 동안 전해왔던 모든 말씀과 가르침이 빠져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나는 감히, 초대교회 시대에 이미 사도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교리화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강렬한 복음의 메시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삶을 단순화하고 축약함으로써 논리정연한 메시아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었을지 모릅니다. 즉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사역을 전하는 대신,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이론적으로 잘 짜여진 교리와 그 틀 안에서 박제화 된 예수를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눈에 보이는 신을 원했고, 약속된 땅에 들어와서는 왕을 얻고자 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의지한 것처럼, 사도들은 정연한 논리로 단장된 십자가의 교리를 전도의 전략으로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그 십자가를 이해하는 기초가 되어야 할 예수의 가르침은 뒤로 미룬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은 초대교회와 사도들의 사역과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박해 속에서도 믿음과 열정과 헌신의 마음을 지킨 초대교회 성도들과 감히 우리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읽고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거기에 비추어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우리로서는, 사도들이 어떻게 예수를 전했는지 차분히 돌아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도 돌아볼 책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예수의 말씀보다 십자가의 교리를 선호한 초대교회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는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우리는 여러가지 교리들을 배우고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타락, 원죄, 구원, 칭의, 성화 등등으로 이어지는 주제들은 특히 형이상학적 주제들인지라 우리는 말에 말을 이어가며 이를 토론합니다. 어떻게 이런 교리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할 것인지 고민하며 노력합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가르쳤던 여러 말씀들은, 우리의 대화와 고민의 주제에 일반적으로 잘 끼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라.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베푼 것이 나에게 베푼 것이다. -
-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고 자선은 남이 보지 못하게 베풀어라. 종교적 위선은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여긴다. -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일관되게 그리고 강력하게 가르친 말씀이며, 전혀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지극히 실제적이고 명료한 말씀입니다. 반면 우리가 전혀 실천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괴리를 놓고 고민하는 대화를 우리는 나누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리에 대해 토론하고 묵상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알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막연하고 모호했던 하나님의 모습이 머릿 속에 깨끗하게 정리되면서 뭔가 더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으로써 더 안정되고 굳건한 믿음과 신앙생활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정점에 놓인 유대교의 질서를 뒤엎는 것이었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모습에도 근본적인 도전을 던집니다. 교리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우리에게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논리적이고 편안한 교리의 가르침이 교회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그래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까지 끊임없이, 절박하게, 안타깝게 우리에게 가르치려 노력했던 그 말씀을 대면하지 않고 그 교리에 담긴 진정한 의미--하나님은 누구이며, 죄란 무엇이며, 구원은 어떠한 얻는가--를 올바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도들과 성도들마저 교리를 예수의 말씀 위에 놓는 오류를 빠졌다면, 나와 같은 사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며, 말씀 속에 숨쉬는 예수님의 도전을 좀 더 진지하게, 좀 더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민해야겠다고 다짐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