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제자반 9월 26일 요약
5과 영적성장과 성숙
고린도전서 3:1-4 에서 말하는 “젖”은 말씀을 수동적으로 듣고 경험하지는 못하는 상태, “밥”은 직접 씹어먹는 것으로 말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해 보고, 연단을 통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말들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과 영적 성숙에 이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영적 성숙은 두 가지를 통해서 입증된다: (1) 말씀을 실천하는 것 (2) 원만한 인간관계.
에베소서 4:13-16은 우리의 영적성장의 모델이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온전함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이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된다. “각자 맡은 분량대로”라고 하였듯이, 각 사람마다 영적성숙을 얻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증거는 누구에게나 나타나야 한다.
영적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들:
- 유모처럼 이끌어줄 멘토 (또는 동역자?) (살전 2:7)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 (벧후3:18)
- 지체들 간의 용납과 관계성의 훈련 (엡 4:16)
- 부단히 달려가고자 하는 결단 (빌 3:12)
이상이 공부한 내용의 요약입니다. (다음 주를 위한 과제는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지령이 내려올지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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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내면 아쉬우므로 (아닌가요?) 몇 가지 제가 느낀 점들을 덧붙입니다.
바울의 말 가운데 개인적으로 제게 가장 큰 도전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입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여러가지를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머리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어느 지체도 남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어느 두 지체도 똑같은 역할을 감당하지는 않으므로 서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아끼며 용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한 몸에 속한 지체이므로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대신 서로 끌어안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 교회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많은 점을 일깨워주는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비유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의미를 최근에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몸이란 머리의 뜻을 행하기 위한 도구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리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몸이란 식물인간에 불과할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몸이 실천해야 할 머리의 뜻이란, 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몸의 외부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 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일은 몸의 외부를 향한 것입니다. 사물을 관찰한다든가, 물건을 움직인든가, 다른 인간과 의사소통을 한다든가, 우리의 일상생활의 기본을 이루는 이러한 행위들은 몸이 몸에게 행하는 일들이 아니라 몸이 머리의 지시에 따라 외계에 대하여 행하는 일들입니다. 물론 몸이 스스로에게, 스스로를 위하여 하는 행동들도 많이 있습니다. 몸의 영양을 위해 밥을 먹는다든가, 외모를 꾸민다든가,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스스로를 위한 행동에만 빠져있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몸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의 안위를 위해서만 자신의 몸을 쓰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어린아이같다고 말합니다.
몸의 기본적인 역할이 외부를 향한 머리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본질은 교회의 바깥, 즉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많이 듭니다. 우리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보았을 때, 그 몸이 갖고 있는 에너지의 몇 퍼센트가 우리 교회 자체가 아닌 세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선교와 복음전도가 있고 또 교회 생활을 통해 훈련을 받아 각 교인들이 각자가 처힌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효과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정말 필요한 일이고 예수님도 원할 일이지만, 우리 교회의 이름도 걸려있지 않고, 우리와 관련된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니고, 우리의 신앙성장에 직접적인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라면, 더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적인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일이라면, 우리가 과연 나서서 우리의 몸을 움직여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건강하고 튼튼한 몸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 말씀을 받고 훈련을 거쳐 든든한 제자로 세움을 입고 또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책임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몸을 벗어나려면 내 몸을 가꾸는 일의 비중과 세상 속에 나가 일하는 것의 비중이 역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난 주 우리 교회는 설립 20주년을 맞아 교회가 성년의 길에 들어섰음을 축하했습니다. 그에 발맞추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는 어른스러운 몸을 이루고 있는지, 아니면 어린아이의 몸 속에 그리스도의 뜻을 가두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예배와 교육과 훈련과 교제와 전도와 선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저절로 세상 가운데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는 행동들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도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기만 하면 저절로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믿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많은 고민과 연구를 통해 신앙성장의 방법론을 탐구하고 그 결과로 수많은 훈련 프로그램과 신앙서적과 교회조직을 동원하여 우리의 신앙을 북돋으려 애씁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고민과 노력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은 왜 존재하고, 내가 누리는 특권들과 이들이 받는 고통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는 질문들이지만, 이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실천의 방법들을 찾아다녀야만 참으로 어른스러운 교회의 모습이 먼 훗날에라도 갖추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대담하게 교회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역설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종교적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5과 영적성장과 성숙
고린도전서 3:1-4 에서 말하는 “젖”은 말씀을 수동적으로 듣고 경험하지는 못하는 상태, “밥”은 직접 씹어먹는 것으로 말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해 보고, 연단을 통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말들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과 영적 성숙에 이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영적 성숙은 두 가지를 통해서 입증된다: (1) 말씀을 실천하는 것 (2) 원만한 인간관계.
에베소서 4:13-16은 우리의 영적성장의 모델이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온전함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이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된다. “각자 맡은 분량대로”라고 하였듯이, 각 사람마다 영적성숙을 얻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증거는 누구에게나 나타나야 한다.
영적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들:
- 유모처럼 이끌어줄 멘토 (또는 동역자?) (살전 2:7)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 (벧후3:18)
- 지체들 간의 용납과 관계성의 훈련 (엡 4:16)
- 부단히 달려가고자 하는 결단 (빌 3:12)
이상이 공부한 내용의 요약입니다. (다음 주를 위한 과제는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지령이 내려올지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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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내면 아쉬우므로 (아닌가요?) 몇 가지 제가 느낀 점들을 덧붙입니다.
바울의 말 가운데 개인적으로 제게 가장 큰 도전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입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여러가지를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머리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어느 지체도 남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어느 두 지체도 똑같은 역할을 감당하지는 않으므로 서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아끼며 용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한 몸에 속한 지체이므로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대신 서로 끌어안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 교회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많은 점을 일깨워주는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비유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의미를 최근에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몸이란 머리의 뜻을 행하기 위한 도구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리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몸이란 식물인간에 불과할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몸이 실천해야 할 머리의 뜻이란, 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몸의 외부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 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일은 몸의 외부를 향한 것입니다. 사물을 관찰한다든가, 물건을 움직인든가, 다른 인간과 의사소통을 한다든가, 우리의 일상생활의 기본을 이루는 이러한 행위들은 몸이 몸에게 행하는 일들이 아니라 몸이 머리의 지시에 따라 외계에 대하여 행하는 일들입니다. 물론 몸이 스스로에게, 스스로를 위하여 하는 행동들도 많이 있습니다. 몸의 영양을 위해 밥을 먹는다든가, 외모를 꾸민다든가,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스스로를 위한 행동에만 빠져있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몸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의 안위를 위해서만 자신의 몸을 쓰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어린아이같다고 말합니다.
몸의 기본적인 역할이 외부를 향한 머리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본질은 교회의 바깥, 즉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많이 듭니다. 우리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보았을 때, 그 몸이 갖고 있는 에너지의 몇 퍼센트가 우리 교회 자체가 아닌 세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선교와 복음전도가 있고 또 교회 생활을 통해 훈련을 받아 각 교인들이 각자가 처힌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효과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정말 필요한 일이고 예수님도 원할 일이지만, 우리 교회의 이름도 걸려있지 않고, 우리와 관련된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니고, 우리의 신앙성장에 직접적인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라면, 더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적인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일이라면, 우리가 과연 나서서 우리의 몸을 움직여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건강하고 튼튼한 몸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 말씀을 받고 훈련을 거쳐 든든한 제자로 세움을 입고 또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책임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몸을 벗어나려면 내 몸을 가꾸는 일의 비중과 세상 속에 나가 일하는 것의 비중이 역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난 주 우리 교회는 설립 20주년을 맞아 교회가 성년의 길에 들어섰음을 축하했습니다. 그에 발맞추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는 어른스러운 몸을 이루고 있는지, 아니면 어린아이의 몸 속에 그리스도의 뜻을 가두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예배와 교육과 훈련과 교제와 전도와 선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저절로 세상 가운데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는 행동들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도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기만 하면 저절로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믿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많은 고민과 연구를 통해 신앙성장의 방법론을 탐구하고 그 결과로 수많은 훈련 프로그램과 신앙서적과 교회조직을 동원하여 우리의 신앙을 북돋으려 애씁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고민과 노력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은 왜 존재하고, 내가 누리는 특권들과 이들이 받는 고통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는 질문들이지만, 이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실천의 방법들을 찾아다녀야만 참으로 어른스러운 교회의 모습이 먼 훗날에라도 갖추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대담하게 교회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역설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종교적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